크리스마스 선물 (필리핀 아드라)

ADRA필리핀은 12년째 아동결연 사업을 하고 있다.

12월 18일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팔을 걷어 올렸다.

대만의 아비가엘에서 중고의류와 후원물품을 보내줬다.

한국의 완전 소소한 마켓 단체에서 학용품을 보내줬다

한국의 천성어린이 교회에서 학용품과 물품에 손편지를 채워 보내줬다.

ADRA 코리아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지원해 줬다.

필리핀의 AIIAS 아카데미 G9학생들이 특별한 게임과 노래 상품을 준비해왔다.

ADRA 필리핀 직원들이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직접 요리를 하고, 파티 분위기를 한껏 내기 위해 지원해 온 물품을 포장하고, 게임도 진행하고,

모두가 웃고 떠들면서 크리스마스 파티 분위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을때,

기다리던 간식시간

ADRA 필리핀 직원이 직접 요리한 스파게티와 부코 샐러드, 튀긴치킨 다리, 식빵,

이 간식은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즉, 아동결연사업에 후원을 받고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과 동반한 보호자들을 위해 준비된 식사였다.

제한된 예산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수고한 자원봉사자 학생들은 미안하지만 제외시켰다.

물론 나도 제외

에이~~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어야 했는데,

어중간한 시간이라 먹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나왔는데,

오후2시간 되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래도 싸가지고 올껄…..후회가 밀려왔다.

어슬렁 거리며 맛있게 식사하고 가족들 틈을 다니며 인사를 나누다가

크리스티를 만났다.

대학교 2학년인 크리스티는 남동생과 엄마와 참석했다고 한다.

남동생이 5년째 아동후원을 받고 있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크리스티는 이제 대학생이 되어 아동후원을 중단되었지만,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대학에서 경영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전액 장학생이 되었어요?”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딸이 성적이 좋아요, 공부 잘해요. 내가 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정말 잘 커줬다.

예쁜 대학생 크리스티가 웃으면서 “밥 먹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거짓말을 했다. 사실 배가 고팠는데….

그녀의 엄마가 ” 이거 주스 드세요” 라며 자신이 받은 주스를 나눠줬다.

크리스티가 부코 샐러드를 나에게 건넸다.

“아니예요, 드세요!” 내가 거절하자, 막무가내로 손에 쥐어줬다. 환한 미소와 함께….

순간 울컥….

사실

여기 저기에서 후원받아서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줬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나눠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어깨에 뽕이 몇겹은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뻐기고 있었는데…..

크리스티를 보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선물을 나눠주고 있는게 아니라 선물을 받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우리의 선물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반듯하게 잘 커준것…..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 열심히 해 준것….

엄마, 아빠의 꿈이 되어준것

작지만 나눌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커준것…

이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ADRA 앞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이들이 모두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였다.

넘치도록 과분한 선물을 받은 날이었다.

애들아 크리스마스 선물 고마워!

잘 커줘서 고마워!

대신 받은 인사 전해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필리핀 아드라)

화창한 일요일,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지나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 후원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망고 마을!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

그러나 그곳에서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태어날 때 부터 오른손이 없이 태어난 엘리자벳을 만났다.

환한 미소가 너무 예뻐 그녀의 손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뒤 늦게 발견한 손을 발견하고 애써 놀란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나를 놀리듯이,

그녀는 더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손을 보여줬다.

“제 손 끝에 아주 작은 손가락이 붙어 있어요. 귀엽죠?”

그녀가 내민 마디 하나가 부족한 뭉뚝한 팔끝에 보일락 말락하는 작은 손가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씩씩하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로 8년째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후원을 받고 있다며

이야기 나누는 동안 여러번 엄마와 함께 감사인사를 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지금(고3)까지 받은 후원으로 학업을 끝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복, 학용품, 교통비, 쌀, ……

그녀는 조목 조목 나열하면서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제 그녀는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커튼이 흔들릴 때마다 커튼 뒤로 보이는 사춘기에 입문한 남동생들이 보였다.

못본척 눈을 피했다.

사춘기 친구들 마음이 불편할까봐….

또 다른 집을 찾아갔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희망을 보았다.

엄마 , 아빠의 꿈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또 다른 집.

유난히 미소가 밝은 그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그녀의 부엌옆,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4 아이의 씩씩한 엄마가 끝내 눈물을 터트렸다.

삶의 무게를 넋두리처럼 쏟아 내며 흘린 눈물이 아닌,

5년째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주신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며….

감사의 눈물이 볼을 타고 쉴새 없이 흘러 내렸다.

내 눈가도 촉촉해 졌다.

그리고 나도 감사했다.

내가 이 길을 걷기도 전에 누군가 길을 만들어 돕고 있었기에

오늘 내가 대신 감사 인사를 받았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4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4아이의 씩씩한 엄마가 계속 환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양철지붕으로 얼기 설기 엮어 놓은 집.

그 안에도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5년째 후원을 받고 있다는 소년은 이제 자라서 대학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소년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변호사가 꿈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소녀

그녀의 4명의 형제들의 꿈도 벽 위에서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사업은 아이들이 꿈에 도착 할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또 다른 집.

그곳에서

혼자서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29살 젊은 엄마를 만났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설명하던 그녀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도 아이에게 보내준 후원에 감사를 전했다.

나는 더 많은 걸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 동안 쌓아놓은 눈물이 쏟아져 나올까봐 더 이상 질문을 건네지 못했다.

엄마의 슬픔이 느껴져서 였을까?

아이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준비해 간 색종이, 고무찰흙을 하나씩 나눠 주자

아이들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알록달록 색종이로 작품을 만들 수 있겠지?

오늘은 알록달록 고무찰흙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보겠지?

비록 힘든 환경이지만,

아이들의 꿈도 알록 달록 다양하게 아름답게 꾸며졌으면 좋겠다.

망고마을 나무에는 아이들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나무도 누군가가 오래전에 심어 두었기에 지금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거겠지!’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사업도

필리핀에서 12년전에 시작한 누군가가 있었기에

나는 오늘, 8년, 5년동안 도움을 받고 잘 자라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그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오늘 넘치는 감사인사를 대신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먼저 이 길을 내고,

오랜 시간 이 아이들에게 헌신 해 준, 누군가에게 감사인사를 꼭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아이들을 위해 보내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대신해서 많은 감사인사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대신 받은 인사 다시 여러분께 돌려드립니다.

그 동안 보내주신 사랑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오늘 누군가가 미리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망고마을을 빠져나왔다.

러시아, 우크라이나로 전달된 K – 나눔 (필리핀아드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다.

사람이 경영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적절한 시간에 일하신다.

사람을 통해서…..

어려운 나라에 중고옷을 모아서 보내주시는 고마운 분이 계시다.

오랜만에 통화중에 그분이 갑자기 말씀하셨다.

“옷을 2상자 보냈는데요. 도착했나요?”

“옷을 보내주셨어요?”

“네 제가 말씀을 못드렸네요 이미 보냈어요”

“감사합니다.”

“더 많이 보내드리고 싶은데요. 국제택배비 부담이 있어서 제가 그 때 그때 보내드릴려구요”

“너무 감사합니다”

하루가 지났을까?

알고 지내던 또다른 지인이 30만원을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받은 후원금을 중고옷을 모아 보내주시는 분께 입금해 드렸다.

택배비 부담을 조금 덜어 드릴 수 있어 감사했다.

드디어

한국에서 중고 옷이 도착했다.

누구에게 나눠 드리면 좋을까?

이곳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람들이 생각났다.

전쟁중인 나라

현재 러시아 강제 징집령까지 내려 어수선한 나라

몸은 필리핀에 있지만

마음은 그들의 나라에 가 있는 사람들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겉모습으로는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닮은 두 나라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운 전쟁

서로를 챙겨주고,

서로의 나라를 걱정해 주고 있는

보통사람들

그들의 마음의 걱정이

평화를 향한 그들의 간절함이 모두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보내준 옷으로 잠시 위로받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길 기대한다.

봉사의 달인 – 필리핀 아드라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중학교 2학년,

필리핀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고1, 고3학생,

막 사춘기에 입문하려고 하려고 하는 초등5학년,

어리광만 부리는 초등2학년.

이들이 봉사활동을 위해 일요일 아침 모였다.

오늘의 미션,

대만에서 보내온 중고 옷 분류 작업!

ADRA 물류보관창고에 넓직한 비닐을 깔아 놓고, 상자마다 꾹꾹 눌러 보낸 중고 옷들과 물품들을 쏟아냈다.

대만 아비가엘팀이 모아서 보내준 중고 옷과 물품들….

꺼내 놓으니 양이 어마 어마했다.

과연 오늘 하루 이 일을 끝낼 수 있을까?

나의 걱정은 쓸데없었음이 밝혀졌다.

봉사하는 순간은

어린아이도,

온실에서 자란 귀한 도련님들도 아니었다.

빠른 손.

초 집중.

봉사의 달인들이었다.

먼지 가득한 창고안에서 불평하는 말도

힘들다는 어리광도 없었다.

너무 열심히 일한 봉사자들 덕분에 2시간만에 일이 마무리 되었다.

ADRA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준비된것이 아무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부코!!

킹부코 나무가 아드라 뜰안에 있지!!

시원한 천연 음료수를 한통씩 마셨다.

쉬는 시간 다시 아이로 돌아왔다.

부코를 흘리면서 마시고

장난치고

귀한 도련님들 빨대 없냐고 묻고….

아이들이 이웃들에게 작은 나눔을 실천하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봉사의 달인들!

오늘 고마웠어요.

땀흘려 일하고

소소한 부코 마시며 환하게 웃어준 봉사의 달인들이 있어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오늘 아이들이 분류해준 중고 물품들은

12월 18일에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 에서 준비하고 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사용될 것이다.

저소득층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CSP 프로그램 수혜자 아이들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귀한 아이들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만의 친구들이

한국의 친구들이

필리핀 친구들이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힘들지만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

나중에 ‘봉사의 달인’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누는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길 기대해 본다.

앓던 이 소탕작전 1 – 필리핀 아드라

필리핀은 의료제도가 약하다.

그래서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이’ 치료는 사치다.

과거 나의 어린시절도 그랬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이가 아파 한쪽 볼이 퉁퉁 부어오르면 밤새 치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생마늘을 입에 물고 밤새 고통을 달래던 시간이 있었다.

앓던 이 만큼 괴로운 존재는 없다.

앓던 이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작전명 ‘이웃사랑’

앓던 이 소탕작전을 위해 제1 특공대들이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소탕작전에 필요한 물품을 넘치도록 싸들고 왔다.

도착하자 마자 강행군이다

시차적응에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내색하지 않고 활짝 웃으면서 특공대의 면모를 보여줬다.

제2 특공대들이 솥단지를 차에 싣고 달려왔다.

특공작전에 지치지 않도록 푸짐하게 먹이려고 한 차 가득 싣고 왔다.

제3 특공대들이 초록색 ADRA 자원봉사자 티를 입고 국제학교 수업도 하루 반납하고 달려왔다.

마치 ‘제가 이런 날을 위해 그동안 영어를 배웠습니다’라고 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혈압체크 후 번호표를 받고 대기중
초조하게 앓던 이 소탕하기 위해 번호표를 받고 대기중
앓던 이 소탕작전 성공 인증샷
용감한 형제
치과진료 처음이라 무서워요!

앓던 이를 빼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 녀. 노. 소.

그리고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우.

이분은 오늘 맞선보러 나오는 날로 생각하셨나 보다, 친구의 손을 의지해 가장 밝고 깔끔하게 입고 나타났다.

빈부차가 큰 나라, 필리핀

부자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 필리핀

이곳에서 가난한 사람보다 더 약자로 살아가는 가야 하는 사람은 장애우다.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치과진료는 사치다

오늘은 그 사치를 한 번 시원하게 경험하는 날이 될것 같다.

그것도 특공대들의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손발이 이렇게 잘 맞다니…

특공대들의 손발이 척척 맞는다.

모든 상황이 영어로 진행되는데도 제3특공대들 끄떡없다.

​진료가 끝난 치과기구들을 소독하는 특공대원.
치과 진료 의자가 없어 플라스틱 의자에서 치료 받는 환자들을 돕기 위해 머리 받침대가 되주는 특공대원
평생 처음 받아보는 치과진료가 무서워 떨고 있는, 어른의 손을 잡아주며 위로해 주는 특공대원
의사선생님의 요청에 민첩하게 소독기구들을 나르는 특공대원

마치 오랫동안 한 팀이 되어 일해 온 것 같이 침착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3 특공대들의 듬직한 모습에 목이 메어 침을 꼴깍 넘겨야 했다.

제1특공대, 국적이 다양한 치과 의사선생님들…

배워서 남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미국에 치과대학을 공부하는게 학업면에서나 재정면에서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공들여 배워 이렇게 귀하게 사용하는구나 생각하니

제1특공대원들의 얼굴이 세상에서 이렇게 잘 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맘이 들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다 키워놓은 아들 딸이 없어 아쉬웠다.

제2특공대, 외국에서 사업을 한다는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차이, 언어차이, 장벽이 산 넘고 산이다.

그 산을 묵묵히 넘고 넘어 이제는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그 여유는 경제적인 여유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약한 자를 돕기 위해 서슴없이 손을 내미는 따뜻한 마음의 여유였다.

그 넉넉한 마음이 오늘 푸짐한 음식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앓던이 소탕작전을 마친 특공대원들에게

필리핀ADRA에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감사장’을 전달했다.

종이 한장에 감사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앓던이 소탕작전 , 작전명 : 이웃사랑 성공!!

앓던 이로 고생하던 이웃들이 오늘은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배움, 그 배움을 응원하고 있는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사업

필리핀 아드라는 CSP(Children’s Sponsorship Program)을 통해 현재 72명의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CSP 는 천명선교사(박광수 원장) 캠퍼스에서 2011년에 시작해서 2018년 부터 필리핀 아드라가 진행하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필리핀은 지난 3년 가까이 학교 문이 닫혀 있었다.

2022년 8월부터 대면수업이 시작되었다.

CSP는 72명의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티셔츠, 신발, 손소독제, 마스크, 쌀과 음식을 전달했다.

작은 선물로 인해 아이들은 더 설레는 마음으로 개학을 기다리게 되었다.

12년째 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한국 ADRA가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아낌없는 후원을 보내주고 있는 한국ADRA에 감사드린다.

오늘도 CSP 후원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샤이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사업인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보다

샤이나가 CSP 수혜자 가족들에게 소액의 장학금과 약간의 쌀을 전달하고 있었다.

오늘 나눠준 쌀 덕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넉넉한 밥한그릇은 먹을 수 있을것 같다.

나눠주는 일을 마친 샤이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샤이나는 csp사업에 남다른 사랑을 갖고 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배움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길을 쉽게 포기하게 되는게 안타까워요. 특히 여자라면 더 배움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 같아요. 가난한 가정의 여자아이들은 일찍 결혼하기 때문에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샤이나의 작은 속삭임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은것은, 그녀가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여자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다행인것은 누군가가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었고, 그래서 배움을 포기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지금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를 돕는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샤이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배움의 기회를 놓칠 뻔 했지만, 초등학교 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8년간 다른 구호 단체의 후원프로그램 통해 무사히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그녀는, NGO단체인 필리핀ADRA에서 배움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있는 CSP 사업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CSP사업을 통해 또 다른 샤이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인터뷰] 아드라방글라데시 이끄는 신승환 부장

뉴스 내용의 첫째 사진아드라방글라데시 신승환 부장(왼쪽)이 방글라데시연합회장 김원상 목사와 함께 현지 구호개발사업 현장을 방문했다.국제구호개발기구 아드라(ADRA / Adventist Development and Relief Agency)가 방글라데시에서 활발한 구호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아드라방글라데시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 한국인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지난해 9월부터 현지 아드라의 운영을 맡은 신승환 부장은 세계 각국에서 익힌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층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해 적용하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새로운 사업계획을 검토하는 협의회를 갖고, 도전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재림마을 뉴스센터>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에서 방글라데시에서의 구호봉사가 중요한 까닭에 대해 “가난하고 어려워 도와야 하는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승환 소장은 “방글라데시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다. 마치 우리나라의 70~80년대 같은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최빈국 지위도 벗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방글라데시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지만,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고 기억하는 것 같다”면서 “오래 전, 잘못된 통계 해석으로 생겨난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여전히 방글라데시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꺼내는 이야기다. 비록 앞으로는 더 발전할 나라지만, 지금은 그만큼 가난하고 어려움이 많은 나라”라고 소개했다.

방글라데시는 대한민국(남한)의 1.5배 정도 되는 면적에 인구는 3배 이상(1억6000만 명)이나 많아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노동력이 그만큼 풍부한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히말라야에서 기원해 서쪽으로 흘러들어오는 갠지스강과 북쪽의 브라마푸트라강이 하류에서 만나 메그나강이라는 큰 강으로 합쳐져 벵골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매우 넓은 삼각주를 이루고 있는 지형에 위치해 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전 세계에서 손꼽는 곡창지대 중 하나다. 게다가 연중 3모작이 가능할 정도의 날씨로 지금도 전세계 4위의 쌀 생산량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런 높은 농업생산성에도 예전부터 많은 수탈과 핍박을 받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슬픈 역사의 땅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지 시절은 물론, 2차 세계대전 말에는 미얀마를 침입한 일본의 인도 진격을 두려워한 영국의 청해전술로 1942년부터 2년 동안 무려 최대 300만 명의 인구가 아사한 벵골 대기근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후 영국과  파키스탄의 오랜 핍박을 이기고, 독립전쟁을 통해 간신히 1971년 진정한 독립을 이뤘지만 정치적인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신승환 소장은 “최근에서야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경제적 안정을 기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높은 인구 밀도로 경쟁도 심하고, 물가도 경제 수준에 비해 매우 비싸다. 그러다 보니 인구의 20% 가까이가 하루 1.9달러도 제대로 벌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매년 벵갈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개의 대형 태풍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한 지리적 요인과 평균 고도 9m대의 낮은 지대로 인해 홍수와 사이클론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재해의 규모와 빈도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것. UN이 전 세계에서 기후변화 위기에 가장 취약한 나라 중 하나로 방글라데시를 지목했을 정도다.

신 소장은 “이런 이유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자연재해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면서 시골과 도시 모두에서 빈민촌이 갈수록 생겨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대단히 열악한 환경이며, 도시에서의 일자리 수준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늘어나는 유입 인구로 인해 도시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더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구호봉사가 중요한 까닭 중 하나로 선교적 필요성을 주목했다.

신 소장은 “아드라의 활동은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이 나라에서 선교적으로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면서 “아드라가 주로 펼치는 사업은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교육, 보건, 경제 개발 등의 방법을 통해 여러 가지 도움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일이다. 아드라 사업과 교회의 선교가 연계되어 협력한다면 더욱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예를 들어 재림교회는 독립 이전부터 이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적잖은 도움을 줬다. 직접적인 선교가 어려워 초기부터 교육 사업에 집중했다. 현재 전국에는 147개의 재림교회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1만 명이 넘는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전체 재림 교인 수가 3만 명 규모인 것을 감안하면 교육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교회 학교와 아드라가 힘을 모아 이들 학교에서의 교육사업을 지원할 수 있다. 교회 조직을 통해 아드라가 건강이나 교육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또한 아드라가 사업을 진행한 곳을 대상으로 교회에서 후속 선교 사업을 펼친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관심과 지원을 호소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그러나 제일 감동적인…

뉴스 내용의 첫째 사진김광일 교수를 비롯한 유럽한인교회 봉사대원들이 우크라이나 전쟁난민이 수용돼 있는 가정형 쉘터를 찾아 음악회를 열었다.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고, 남성 성악가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적막하던 쉘터(임시보호소)에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긴장과 피곤함에 절어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일순 미소가 피어오르고, 불안해하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입가에는 웃음이, 눈가에는 이슬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번 아드라코리아(사무총장 김익현)의 우크라이나 난민 봉사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8명의 재림청년과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위로음악회, 구호물품 포장 및 운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때로는 자신의 달란트로 먹먹한 감동을 선사했고, 때로는 손과 발을 아끼지 않는 헌신으로 힘을 보탰다.

독일에서는 10시간을 훌쩍 넘겨,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오스트리아에서도 8시간을 꼬박 달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이들은 불과 사흘 전, 유럽연합야영집회를 마친 터라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지만, 기꺼이 폴란드의 제슈프로 자동차 핸들을 돌렸다.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으로 간다고 하자 위험하다며 한사코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였다.

지난달 23일 저녁 시내의 한 대형 쇼핑센터에 마련된 임시보호소에서 진행한 음악회에는 100여 명의 난민이 자리를 같이해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누렸다. 대원들은 40분 동안 ‘사랑의 인사’ ‘참 아름다워라’ ‘자비로운 주 하나님’ 등 성가와 클래식곡을 선사했다. 독창, 바이올린 독주, 피아노 독주 등 레퍼토리도 다양하게 꾸몄다.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오자 ‘관객’들의 표정이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거나 한쪽 손을 턱에 괴고 무대를 응시하기도 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남기는 일은 기본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임산부와 장애인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의 발길이 이어졌다.

바리톤 김광일 교수가 자신들의 언어로 국가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를 부르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격정적 감정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몇몇은 마치 국기게양을 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객석은 “브라보!”를 연발했다. 봉사단이 장비를 챙기고 건물을 나설 때까지 복도 끝에 서서 감사인사를 건넸다. 진심어린 표정이 이들의 마음을 대신 말해줬다.

앞서 이날 오후와 전날에는 가정형 쉘터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특히 제슈프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작은 마을 드라커비스카즈의 한 농가에서 진행한 음악회는 한동안 잊히지 않을 만큼 깊은 여운을 남겼다. 재림교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꾸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이 채 20명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음악회였지만, 세상에서 제일 감동적인 콘서트였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자비로운 주 하나님’ 등 재림교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곡으로 꾸몄다. 김광일 교수가 난민소녀를 즉석에서 초청해 함께 부른 ‘You Raise Me Up’은 지켜보는 사람도 절로 눈물이 흐를 만큼 울림이 컸다. 지그시 눈을 감고 무언가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얼굴도 보였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듯한 이도 있었다. 준비한 순서가 모두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였다.

난민 위로음악회는 이번 봉사일정 중 대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를 위해 때로는 식사도 거른 채 일정을 소화했고, 피곤한 몸에도 밤 11시가 넘도록 연습하는 등 정성을 들였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서다. 그래서인지 음악은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통하는 길이었고, 하늘과 연결되는 메시지였다.

자신의 전공을 살린 재능기부뿐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 봉사하기도 했다. 이들은 도착 이튿날인 22일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인 라듬노의 한 물류창고에서 아드라인터네셔널과 함께 구호물품의 포장 및 운반 작업을 했다. 라듬노는 국경과 가깝고, 도로 등 제반시설이 잘 갖춰진 도시.

70인승 대형 버스 2대에 통조림, 파스타, 시리얼 등 먹을거리는 물론 매트리스, 유아용품, 위생용품 등 각종 생필품을 가득 실었다. 구호물품은 그 주 일요일인 24일 우크라이나의 서부 거점도시 리비우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현지 아드라를 통해 각 지역으로 배분되고, 돌아오는 차량편에 난민을 태워 나온다. 이렇게 일주일에 3~4차례 반복한다고.

아드라폴란드 직원 카시아 카트리나 씨는 “이 활동은 전쟁이 시작된 2월 말부터 진행했다. 인도주의적 구호물품을 실어나르는 차량은 국경을 오가는 데 문제가 없다”며 “아드라처럼 우크라이나에 직접 들어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단체는 예닐곱 곳 정도로 그리 많지 않다. 오늘 한국인 봉사자들이 오셔서 평소보다 작업이 일찍 마무리됐다”고 고마워했다.

아드라폴란드 측은 “지금까지 아드라코리아에서 많은 지원을 해 주셔서 크게 감사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을 부탁한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식료품이 부족해 굶거나 전력공급 중단으로 난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도로가 끊겨 기본적인 생필품 조차 제때 전달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무거운 물건을 나르느라 구슬땀을 흘린 대원들은 “물품이 많아 그만큼 자원봉사자도 많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인력이 없어 깜짝 놀랐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이 크다. 모쪼록 이 물품들이 우크라이나에 가서 어려움에 처한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들은 오는 길에 유럽연합야영집회에서 특별모금한 3600유로(약 500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해 더욱 뜻을 깊게 했다.

아드라코리아 김익현 사무총장은 “여러분은 오늘 평생 잊지 못할 매우 의미 있는 활동을 했다. 구호물품에 여러분의 사랑과 응원의 마음이 함께 담겼을 것으로 믿는다. 앞으로도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신실한 재림청년이 됐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그날 밤, TV에서는 이번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2000명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 우크라이나 돕기 특별 모금계좌: 우리은행 1005-002-152773 (사)아드라코리아
– 후원영수증을 원하시는 분이나 기타 자세한 사항은 아드라코리아 사무국(☎ 02-3299-5258)으로 문의하시면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