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8) 박정양 음악학과 교수
삼육대학교 홍보팀이 인터뷰 기획 ‘청춘의 독서’를 연재합니다. 우리 대학 교수님들이 청춘 시절에 품었던 고민과 의문, 희망 혹은 사랑 같은 것들을 ‘독서’라는 화두로 풀어보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코너 이름인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 작가의 동명 저작에서 따왔습니다. 하지만 기획 의도는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p.141)는 문장에 보다 가까운 것 같습니다.
청춘은 느닷없이 지나가 버렸지만, 교수님 인생에 여전히 깊고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책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삼육대학교 구성원 모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사소한 대화가 삶의 갈림길에 선 우리 대학 청춘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길 소망합니다. ─ 편집자 주
Q. 교수님께 독서란 무엇인가요?
“‘단백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백질은 생명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성장한 세포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고, 노년에는 건강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합니다. 특히 운동선수처럼 일반인보다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더 많은 단백질이 필요하죠.
독서라는 것은 우리 정신세계에서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적인 활동을 더 활발히 하거나, 책임 있는 위치에 있거나, 조직에서 남다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머슬’을 갖춰야 하는데, 여기에 반드시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독서란 단백질이라고 생각합니다.“
Q 작곡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떻게 작곡가의 꿈을 갖게 되셨나요?
“아버님이 목사님이셨는데 주로 시골에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그리고 밤이면 무서운 소리. 캄캄한 밤에 화장실에 가려면 대문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데, 그때의 공포감 같은 것들이요. 그런 자연이 주는 다양한 느낌과 감성을 풍부하게 겪었던 것 같습니다.
또 아버님이 클래식 음악 LP판을 많이 소장하셨는데, 그걸 많이 들었습니다. 시골이라 딱히 할 게 없었어요. 더구나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라 세속적인 문화에 차단되어 있었죠. (웃음) LP판을 듣는 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수백 번을 듣다 보니 나중에는 음악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음’이라고 하는 세계에 어떠한 규칙, 원칙이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깨닫게 됐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쯤 우연히 화성학 책을 접했는데,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이 거기에 다 들어있었어요. 그렇게 화성학을 독학하고, 교회에 있는 풍금으로 멜로디에 화음도 붙여보고 아버지한테 들려드리니까 잘했다고 안아주시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꼭 작곡가가 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음의 세계에 빠져 있었어요. 집에서는 신학을 전공하길 원하셨지만, 결국 작곡과에 갔고 제 커리어가 시작됐습니다.“
Q. 현재 중견 작곡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간 한국과 서양의 음악기법, 정서를 융합하는 시도를 많이 하셨어요. 대표작으로 우리 민요 아리랑을 바로크부터 낭만파까지 서양음악의 양식을 빌려 재탄생시킨 ‘아리랑 변주곡’이 있습니다. 한국창작무용단과도 무대를 올리셨고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박사를 했습니다. 유학을 간 이유는 서양음악사에서 발전된 첨단 음악 기법이나, 미학적인 세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현지 교수들은 오히려 동양에서 온 한국 작곡가가 왜 서양적인 것을 추구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서양음악의 시스템이나, 테크닉, 기법을 활용하더라도, 음악적인 재료와 소재는 “너만의 것, 네 나라의 것, 우리(서양)에게 없는 걸” 하라는 거였죠. 김치를 아주 좋아하는 한 교수님은 “김치 맛을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음악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국악개론을 공부하고 경험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세계무대에서 서양음악의 수준에 매칭할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한참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죠. 한국에 있을 때 공부할 기회가 많았는데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고, 후회가 많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에서 한국음악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부터 <한국음악사>, <국악작곡입문>, <판소리의 이해>, <한국음악의 멋> 등 한국음악의 미학, 철학, 역사뿐만 아니라, 미술, 춤, 건축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예술을 공부했습니다. 한국의 리듬이나 선율, 형식적인 특징을 이해하고, 한국음악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그 뿌리는 뭔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세계화에 보탬이 될지, 내 작품이나 정체성에는 어떻게 적용할지 하는 문제들이 계속해서 숙제로 남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작품이 ‘아리랑 변주곡’(아래 영상)이었습니다. 아리랑을 베토벤, 슈만, 리스트, 바흐 등 여러 서양 작곡가의 양식으로 변주한 작품입니다. 우리 전통놀이 음악인 ‘강강술래’를 관현악판타지로 편곡하기도 했고요. 지금까지도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서양악기로 표현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Q. 작곡가에게 책이란 무엇입니까.
“매우 큰 영향을 받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산입니다. 지난해 비올리스트 김남중의 위촉을 받아 작곡해 스페인에서 초연한 ‘Transcendental Sonority for Viola Solo(비올라 독주를 위한 초월적 울림)’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입니다. (관련기사▷창작곡 ‘초월적 울림’ 스페인서 세계 초연한 박정양 교수) 작곡자, 연주자, 청중 모두 경험적(Empirical) 인식보다는 선험적(Transcendental) 직관과 감성에 의존해서 작곡하고, 연주하고, 감상하는 경우가 많다는 아이디어를 곡에 담았습니다.
보통 아이디어와 악상이 만나는 지점이 계기가 돼 곡을 씁니다. 작품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책이라는 거죠. 또 작가는 과거의 유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을 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기에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호흡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책을 계속해서 읽어내야 합니다.“
Q. 얼마 전 학술정보원장(도서관장)으로서 기획하고 추진하신 ‘길 위의 인문학’이 코로나 가운데서도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보건, 심리, 미술, 원예, 체육, 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 교수님들이 본인 전공의 관점으로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하는 통섭적 시도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떻게 기획하시게 됐나요?
“대학에서 도서관은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지난해 초 학술정보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빌려보거나 공부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인문학 강의, 전시회, 음악회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한국도서관협회가 비슷한 취지로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도서관 지원사업을 공모했고, 우리 학술정보원이 선정돼 예산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관련기사▷학술정보원 ‘길 위의 인문학’ 개강…10주간 인문행사 풍성)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라는 책을 주제도서로 정하고, 10주간 다양한 전공 분야 교수님을 강단에 모셨습니다. 각기 다른 전공 교수님들이 클래식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다른 시각과 경험, 체험을 이야기해주셔서 매우 입체적인 강연이 됐습니다. 또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 낭송 음악회 등 코로나 상황에서 공감과 치유에 포커스를 맞춘 여러 부대행사도 마련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관련기사▷학술정보원 시낭송 음악회 “코로나 블루 위로”) 지난해 프로그램을 운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는 더 깊고 넓은 시도를 할 계획입니다.“
Q. 2019년 대학원에 통합예술학과를 신설하고, 초대 학과장을 맡으셨습니다. 작곡가로서 교육자로서 행정가로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에서 ‘통합예술’이라는 공통된 키워드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야흐로 융복합의 시대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아 다양한 산업 분야가 합종연횡하면서 막대한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되고 있습니다. 시대정신과 함께 호흡해야 하는 예술인의 역할도 이에 맞게 달라져야 하지요. 예술인들이 자신의 장르와 전문 분야에만 갇혀 있고, 융합하지 않으면 결코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예술도 산업이나 다른 학문 분야와 협력하고 융합해서 시너지를 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통합예술적 사고를 갖춘 예술교육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은 대학의 역할일 것입니다. 우리 대학원 통합예술학과에서는 음악, 미술,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전공실기 뿐만 아니라, 예술사, 교육론, 장르별 콘텐츠 연구, 정책 및 경영, 환경디자인 등 여러 학문 분야를 산학연과 연계된 저명한 교수진과 함께 연구해 통합예술교육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Q. 앞서 ‘길 위의 인문학’을 시작하면서 “코로나19 장기화로 위축된 정서를 치유하는 힐링의 장이 될 것”이라는 초청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손쓸 새 없이 확산하는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무력감을 호소하는 이 시기에 인문학, 넓게 말하면 독서가 어떤 효용이 있을까요?
“대학시절 지하철로 통학하면서 손바닥만 한 문고판 철학 서적을 늘 읽던 기억이 납니다. 저 역시 청춘시절 고민이 많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결코 순탄한 시대가 아니었지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판단을 할 때 책에서 얻은 깨달음들이 등불이 되어줬습니다.
삶의 문제는 결코 또래 친구들과 만나서 밥 먹고 떠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정신의 스승들에게 솔루션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그 자체가 어떤 갈등 혹은 고민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특정 한 권의 책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폭넓게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사상을 경험하면 분명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는 데 가이드가 되어줄 것입니다.
다만 영적인 세계는 철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성경이 어렵다면,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 같은 책을 권합니다. 찰나를 살고 끝나는 인간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말고, 무한한 우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신이란 무엇인지, 종교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청춘시절 매우 중요한 경험일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도 못 만나고 아무 데도 못 가고 있지만,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작곡하는 학생들에게는 집에서 곡 쓸 시간이 많아진 거죠. 이런 시기에 책을 통해 내면을 성장시키고 살찌우고 위안과 마음의 평화도 얻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정양 교수의 추천 책
<점·선·면>
바실리 칸딘스키 저, 차봉희 역, 열화당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책입니다. 점, 선, 면은 기하학에서 다루는 용어인데, 이것이 회화는 물론 음악, 무용, 미술, 문학 등 모든 예술 장르에 다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칸딘스키는 예술작품들이 공통분모 없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세계에서 만들어지고 혼용되기에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봤습니다. 점, 선, 면과 같은 조형적이고 기하학적인 요소가 바탕이 되어야 영속적 가치를 지닌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가령 점이라는 것은 어떤 작은 위치를 나타내지만, 모든 우주를 포괄하는 엄청나게 큰 무엇을 상징하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장르를 떠나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예술성이나 개성을 표현하고 싶은 학생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될 것입니다.
<Trivium>
John Michell 외, Bloomsbury USA
<Quadrivium>
Miranda Lundy 외 저, Bloomsbury USA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에 이르는 시기에는 자유민의 교양을 위한 7개의 필수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문법·논리학·수사학은 3학(學) 즉 트리비움(Trivium)으로, 산술·기하·음악·천문학은 4과(科) 콰드리비움(Quadrivium)으로 불렀습니다. 이를 통해 7자유학예(ars liberalis)라는 학문체계를 세웠죠.
트리비움은 언어에 관한 것으로, 사람들이 소통하고 설득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내용입니다. 콰드리비움은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을 다룹니다. 전부 수에 관한 내용인데, 음악도 포함되어 있어요. 음악 역시 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또 음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과 성격을 비롯한 근본적인 질을 바꾸는 역할을 하기에, 당시 리버럴 아츠의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오래전에 어떻게 이렇게 완성도 높고 지속력 있는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놀랍습니다. 리버럴 아츠라는 것은 인간을 무지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자신의 틀에서 해방시켜주는 학문입니다. 최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읽고 있는데 정말 보물 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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