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화잇 기도력

오늘의 말씀

6. 23

피할 수 없는 궁핍일 때 온정을 베풂

주제성구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 13 : 18).

비유 가운데서(마 18:32) 주인이 그 빚졌던 무자비한 종을 불러다가 말하였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붙이니라.” 예수께서는 그와 같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하셨다.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 결국 용서의 희망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교훈을 잘못 적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그분께 순종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경감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동료 인간에 대한 용서의 정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경감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 : 12)라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그분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빚진 자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록 지혜롭지 못한 처사로 인하여 빚을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옥에 가두거나 압제하거나 난폭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교훈이 태만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 : 10). 주님께서는 힘써 일하는 사람들에게 게으른 사람들을 부양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많은 사람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노력을 적게 하므로 가난하고 궁핍하다. 이러한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은 마치 구멍 뚫린 주머니에 돈을 넣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가난한 자도 있으니 우리는 불행한 자들에게 친절과 동정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취급할 때 우리가 바로 그 같은 처지에 놓일 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대접을 그들에게 해 주어야 한다(실물교훈, 247,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