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①] 3.1운동 역사에 기록된 ‘삼육인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고, 조국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기획행사가 학계, 종교계, 문화계 등 사회 전반에서 이어지고 있다. 우리 대학도 지난 27일 신학대학 주최로 독립운동가 정재용 선생을 조명하는 특별세미나를 개최했고, 3월 1일에는 경기도 가평군 적목리 신앙유적지에서 특별행사가 박물관 주최로 마련된다.
100년 전. 3.1운동의 만세행렬이 들불처럼 전국을 뒤덮을 당시 우리 대학은 평안남도 순안에서 의명학교(1906년 10월 10일 설립)라는 교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3.1운동이 전 민족적으로 전개됐던 만세운동이었던 만큼 우리 대학 역사 속에서도 이와 관련된 사건과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사료에서 가장 빠른 기록은 1919년 3월 6일에 있었던 평안남도 순안에서의 만세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평안남도 장관이었던 쿠도 오에이이치(工藤英一)가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에게 보내는 보고 자료에 의하면, 평남 평원군 순안에서 6일 오후 4시에 군중 약 5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사립 의명학교 직원생도 다수와 동교 직원급 생도 1명이 포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에 대한 기록은 최경선(崔景善)이 있다. 최경선은 1917년 의명학교를 5회로 졸업한 인물로, 1919년 3월 2일 거촌 안식일교회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엄중한 단속에 막혀 독립운동 추진이 요원해지자 5월에 상해로 건너갔다. 그해 6월 대한독립청년단에 입단하고, 8월부터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의 지시로 평양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1920년 4월 14일에 강계 경찰서에 검거된다.
3.1운동의 현장에서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선교사에 대한 기록도 있다. 1909년 9월 순안 양성학교(우리 대학 전신) 제2대 교장에 취임한 러셀(Riley Russell, 아래 사진) 의사다. 그는 1908년 내한하여 평안남도 순안에 진료소를 세우고 1922년까지 14년 동안 의료사업을 추진한 의료선교사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날 밤 일본군의 발에 총탄을 맞은 한 청년이 순안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러셀과 간호사들은 급히 그 청년을 수술실로 데리고 가서 2개의 총탄을 제거하는 수술과 치료를 베풀었다. 이 일로 러셀과 11명의 병원 직원들이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었고, 러셀은 3개월간 재판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최종 재판은 평양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일본에서 파견된 고급 판사가 심리를 담당했다. 이때 극적인 일이 있었다. 여러 번 법정에 불려가서 배심 재판을 받는 중 판사는 러셀 원장에게 “당신은 미국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이냐?”고 물었다. 러셀은 미국에서 개업의로 일하던 당시 미국 제29대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의 주치의로 있었다. 러셀은 그에게서 온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며 “북미합중국 대통령이 내 친구요”하고 대답했다. 이로 인해 해당 재판은 기각됐고, 무사히 풀려났다.
러셀 원장이 고등법원에까지 기소된 것은 그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행위가 3.1운동과 관련해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의명학교와 3.1운동과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 이 기사는 신학과 이국헌 교수의 <3.1운동에서 재림교회의 역할>과 <삼육대학교 100년사> 내용 중 일부를 발췌·요약했습니다.
[3.1운동 100주년①] 3.1운동 역사에 기록된 ‘삼육인들’
[3.1운동 100주년②] “리멤버 1919” 특별세미나…정재용 선생 조명
[3.1운동 100주년③] 적목리에 울려퍼진 “대한독립 만세!” 삼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