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행복한 가족의 키워드] 행복의 계단, 정체성

2018.10.05 조회수 4,013 커뮤니케이션팀

정성진 교수의 <행복한 가족의 키워드>

걱정과 스트레스가 비교적 적은 십여년의 어린시절 이야 말로가장 행복한 시기일 것이다. 어릴때 경험한 행복은 체득이 되고 습관이 되어 이후 인생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바탕이 된다. 이렇게 행복의 기초를 쌓은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다섯번째 계단으로 나아가게된다.

추상적인 사고가 꽃피다

사춘기(思春期)는 말 그대로 ‘생각의 봄’이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 인생을 사계절로 나눠 본다면 25세까지는 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초봄인 아동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꽃망울이 피어나는 때가 사춘기인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그야말로 사고력이 왕성해진다. 심리학자 피아제(Piaget)는 이 시기를 형식적 조작기(formal operationalstage)라고 불렀다. 앞 단계인 구체적 조작기에서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에 국한하여 논리적으로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면, 형식적 조작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

직관적으로 사고하던 아이들이 점차 논리성을 기르면서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과학자처럼 청소년은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을 논리와 합리에 근거하여 검증한다. 또한 사물이나 개념의 다양한 측면을 조합하고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는 사고력을 차차로 갖추게 된다. 철학적인 개념과 종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사랑과 우정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며, 자기 생각을 체계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고, 논리적이지 않거나 언행일치되지 않는 어른의 모습을 비판하게 된다. 몸도 어른 같아지고 사고력도 어른 같아지는 사춘기, 그러나 이 시기의 청소년은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다.

아직 자라고 있는 중

청소년기는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에 위치한 과도기다. 과도기라서 아동기의 특징과 성인기의 특징이 공존한다. 몸과 사고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신체적으로나 인지적으로 어른 같아지지만 아직은 사회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양육을 받기 때문에 아동의 특징을 이어 간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청소년 자녀는 자기에게 어떤 것이 유리하냐에 따라 아이 행세를 하거나 어른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너무 나무라지는 말자. 비산업화 사회에서는 어제까지 아동이었어도 성인식을 거치면 곧장 오늘부터 성인으로 대접받지만,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대중 교육이 생기고 교육 기간이 길어지면서 몸은 어른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어른 취급을 받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청소년기에 추상적 사고력과 논리력이 발전하지만, 이전 단계에서 극복했던 자기중심성이 다시 생긴다는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중심성은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전조작기와는 다른 것이다.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자기중심성은 자기에 대한 탐색과 타인의 이목에 많이 신경 쓰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소년 가운데는 자기와 타인을 너무 많이 의식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상 속의 청중’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작은 실수에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친구들과 차이 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또한 자기는 너무 특별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자기는 예외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개인적 우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청소년이 부모나 교사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모습도 성격이 나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뇌의 고등 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의도와 의지대로 살려고 하는 성향이 증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두엽은 어른 수준으로 성장하지만 정서를 조절하는 뇌의 변연계 부분이 아직 미숙하고, 전두엽도 변연계를 아직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경질과 짜증을 자주 내기도 한다. 이해하기 힘든 청소년의 모습을 반항이라고 오해하지 말고, 성장하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지혜가 어른에게 필요하다.

다섯 번째 계단, 정체성

인생의 다섯 번째 단계를 에릭슨은 ‘정체성 대 혼란감’이라고 명명했다. 이 시기는 정체성, 즉 자기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와 같은 철학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때이다. 형식적 조작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하지만,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과 교사와 사회에서 전수받은 것과 스스로의 고유한 것들을 분석 및 비판하여 통합해야 하는 매우 어렵고 복합적인 과제다.

아직 뇌가 미숙한 청소년은 이런 과업을 감당하기 위해 작업을 단순화시켜, 부모와 교사와 사회에서 받은 것들을 일단 부정하고 자기 고유의 것에만 집중한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와 거리를 두고 ‘○○의 자녀’와 ‘○○의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뒤로한 채, 고유한 나의 성격과 특성과 장점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문을 잠그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기도 하고, 부모나 교사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며 거리를 두기도 하며,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다. 앞의 네 계단에서 자녀가 행복하게 자랐다면 이 시기에 잠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으면 다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믿고 기다리는 지혜가 어른에게 필요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성격을 탐색하는 때이다. 자기만의 개성은 단번에 찾기 힘들다. 이는 마치 가게에 가서 옷을 살 때 마네킹에 걸린 옷을 보고 단번에 사지 않고, 이 옷 저 옷 입어 보며 동행한 사람에게 어울리는지 물어보는 것과 같다. 청소년은 이 시기에 자기에게 맞는 성격을 찾기 위해 이런 성격 저런 성격의 옷을 갈아입어 본다. 그리고 그 성격이 자기에게 불편하지 않은지 시험해 보고 가족과 친구의 반응과 피드백을 통해 자기에게 어울리는지를 검증한다.

어느 날은 얌전한 성격을 입어 보기도 하고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다음 날은 명랑한 성격을 입어 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격이 변덕스러운 것 같아 보이고, 어떤 날은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배꼽을 잡고 웃다가도 어떤 날은 울적해하며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성격의 옷을 마음껏 갈아입어 보도록 기다려 주고 잘 어울리는지 반응을 해 주는 지혜가 어른에게 필요하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로 인해서 마음껏 정체성을 탐색하기 힘들다. 정체성을 탐색할 시간에 문제집 한 쪽 더 풀라는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체성 탐색을 연기한 청소년들은 정체성 혼란에 빠져서 방황하거나 대학에 들어온 뒤에 인생의 여섯 번째와 다섯 번째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좌충우돌 문제를 많이 경험한다. 특별히 초기 네 계단에서 행복을 연습하고 체험하지 못한 청년들은 밀린 숙제들이 많다 보니 큰 방황을 하게 된다. 그래서 대학교마다 학생상담센터에는 상담 예약자들이 차고 넘친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제때에 맞는 과업을 수행하면서 행복을 연습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도와주고 믿어 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정성진 삼육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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