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1) 김용선 아트앤디자인학과 교수
삼육대학교 홍보팀이 2019년 새해를 맞아 인터뷰 기획 ‘청춘의 독서’를 연재합니다. 우리 대학 교수님들이 청춘 시절에 품었던 고민과 의문, 희망 혹은 사랑 같은 것들을 ‘독서’라는 화두로 풀어보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코너 이름인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 작가의 동명 저작에서 따왔습니다. 하지만 기획 의도는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p.141)는 문장에 보다 가까운 것 같습니다.
청춘은 느닷없이 지나가 버렸지만, 교수님 인생에 여전히 깊고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책’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삼육대학교 구성원 모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사소한 대화가 삶의 갈림길에 선 우리 대학 청춘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매월 캠퍼스 곳곳에 걸리는 글판 현수막은 누가 만드는 걸까.
지난 2016년 3월 김용선 아트앤디자인학과 교수는 학생처장으로 부임하면서 글판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때마다 어깨를 빌려드릴게요’ ‘가을이다 그냥 웃자’ ‘놀라워라, 저기 꿈꾸는 자가 걸어온다’. 흘림체로 새겨진 글자와 함축적인 문장에서 배어나오는 문학적 향기가 짙다. 만 3년째. 최근 그는 21번째 현수막을 걸었다.
화가로서는 ‘김천정(金千丁)’이라는 예명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문자(文字), 즉 ‘문장언어’가 주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한 개인전 작가노트에서는 “문자는 사물의 형상에서 출발하여 고도로 절제되고 상징화된 이미지이며 지적사유의 결정체”라고 했고, 최근에는 ‘책이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열고 책의 물성과 미학을 탐구했다.
‘자존(自尊)’ ‘사유언’ ‘챌린지 프로젝트’ ‘따뜻한 사람’ ‘천원의 행복’ 등 그간 학생처장으로 재직하며 추진해온 사업들의 ‘네이밍’도 남달랐다. 부임 첫날에는 ‘학생이 행복할 때까지 지원하겠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청년시절부터 이어진 왕성한 독서행위가 김용선이라는 한 인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듯 했다. “작은 문예지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있다”고 조심스레 고백한 그는 답변 한 마디 한 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밀도 높은 언어를 구사했다. 시인 같았다.
Q. ‘청춘의 독서’ 첫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간단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첫사랑이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첫 인터뷰는 부담이 됩니다. 하루 지나면 후회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감당해야 할 특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Q. 식상한 질문입니다만, 앞으로 이 코너의 고정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 독서란 무엇입니까.
A. 나에게 독서란 ‘화학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속의 단어나 문장들이 가슴으로 들어와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호모 케미쿠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화학 하는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은 온통 화학제품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화학제품은 물질과 물질끼리 만나 반응한 결과입니다.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책속에 있는 단어와 문장은, 때로는 밤안개처럼 스멀스멀 내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벼락처럼 순식간에 가슴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에게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반응의 크기가 우리 삶의 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Q. 미술을 전공하셨습니다. 대학시절엔 어떤 책을 읽으셨고, 어떤 책에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A. 79학번이니, 80년대 초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민주화 열기가 대학가에 퍼질 때였지요. 꽃향기 대신 최루가스가 캠퍼스 곳곳에 자욱했습니다. 그 시대의 화두는 ‘민주’ ‘노동자’ ‘민중’이었습니다. 이성복 황지우 신동엽 박노해 김지하 시인, 그리고 함석헌 선생님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귀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정현종 같은 서정 시인들도 참 좋아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 같습니다.
가장 영향을 받았던 책은 한완상 선생의 <민중과 지식인>입니다. 민중은 두 가지인데, 의식화되지 못한 민중이 ‘즉자적 민중’이라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민중은 ‘대자적 민중’이라는 내용입니다. 제 청춘시절의 자아를 발동시키고, 의식적인 청년으로 살아야겠다는 영향을 준 책입니다.
Q. 대학생들이 흔히 하는 전공에 대한 고민은 없으셨나요?
A. 미대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내 멋대로 그리면 모두 예술이 되고 명작이 되는 착각에 사로잡혀있었지요. 2학년이 되고부터 미술 이론과 해부학, 매일 수십 장씩 던져지는 드로잉 과제 때문에 몸살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을 할 때마다 절망과 한계를 느끼며 여러 번 붓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방황하기를 여러 달, 우연히 청계천 책방에서 조각가 로댕이 쓴 <로댕어록>이란 책을 만났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김용선 교수는 아래 문장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일하면서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때가 많다. 진보란 더디고 불확실한 것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열리게 된다. 그러니 예술가는 그날이 너무 멀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젊은 날에 청춘의 활기가 넘칠 때에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불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모든 것들을 태워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화학반응이지요. 그날 바로 마음을 다잡고 교실로 들어가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교수가 되고 나서 한 제자가 똑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책을 주면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용기를 준 기억이 납니다.
Q. 캠퍼스 곳곳에 걸린 글판을 제작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A. 2016년 3월부터 시작해서 벌써 21번째 현수막이 붙어있습니다. 평균 1달 반 정도 걸어놓습니다. 대개 현수막은 어떤 결과를 자랑하거나, 행사를 눈에 띄게 광고하는 목적으로 쓰입니다. 모두 경쟁 가치를 추구하는 문구들로 채워지지요. 그런데 ‘비경쟁가치언어’로도 현수막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20자 내외로 문장을 창작하고, 직접 손으로 써서 편집을 해 걸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Q. 3년쯤 하셨으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저기 꽃들이 피네요, 그냥 눈물이 납니다’라는 현수막을 건 적이 있었는데, 두 학생이 학생처에 찾아와 “꽃이 피는데 왜 눈물이 나느냐”고 따지듯이 물어본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그 어린 새싹이 저 얼어붙은 땅을 헤집고 나와 꽃을 피웠는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느냐고요.
불암산도 태백산맥도 멀리는 히말라야 산맥도 바로 내 옆에서 피어나는 풀 한포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풀 한 포기를 유심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이렇게 되묻고 나니 그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한 번은 ‘봄이 왔는데 설레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조금 센 문구를 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주변 교수님들이 “난 사람도 아닌가봐”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셔서 한 달도 안돼서 뗀 적도 있습니다.(웃음) 붙인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다음 문구는 뭐냐고 질문하시는 교수님들도 있고, 친구가 있는 대학에서는 현수막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관심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삼육대학교에 가면 비경쟁언어로 쓰인 현수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Q. 가장 애착이 가는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A. 제일 처음 걸어놨던 현수막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우리들의 봄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우리(교수들)의 존재 이유가 되는 학생들은 우리들의 봄이 분명합니다. 때론 힘들고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래도 청년은 봄의 계절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슬픈 상자 속에 들어있으면 슬픔밖에 보이지 않지요. 다행인 것은 슬픔이나 계절이나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라고 했던 정현종 시인의 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Q. 이 코너의 첫 인터뷰이라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요즘 20대들은 극심한 청년실업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청춘’과 ‘독서’라니. 순진하고 한가한 소리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청춘시절의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우리 청년들의 앞날이 칼날보다 무섭다는 말을 합니다. 또 많은 미래학자들이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합니다. 무책임하지만 정직한 말이죠. 모든 것이 마냥 흘러내리고 완전하거나 확실하거나 뚜렷한 것이 없는 액체의 시대입니다. 이처럼 앞날이 불확실할 때일수록 생각의 크기, 정신의 크기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려고 하니 괴로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책을 읽는 것입니다. 또 책은 산이나 강과 같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막상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에게 정말 많은 양식과 지혜를 줍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더더욱 책에 집중하고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삼육대학교 청춘들에게 응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멍게는 유생 시기에는 올챙이처럼 잘 움직입니다. 안점, 후각계, 뇌, 근육, 지느러미, 척삭, 신경 등 상당히 고등한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 자라고 나서는 이 기관들을 퇴화시키는데, 끝내는 자신의 뇌마저 소화시켜 버립니다. 그 후로는 아무 생각이나 움직임 없이 그저 바위에 몸을 붙인 채 여과 섭식만 하는 식물적인 식생을 유지합니다.
자기 뇌를 삼켜버린 이 멍게처럼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식물로 살아가선 안 됩니다. 젊은이의 영토는 자신이 달려가는 곳까지입니다. 저 바람 부는 날 허공에 길을 내는 거미를 보십시오. 불안하고 바람이 불어와도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거미처럼 여러분도 어떠한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달려가십시오.
교수님의 ‘인생 책’
눈물의 편지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 저, 넥서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용미리 납골당을 방문한 유족들이 망자에게 남긴 방명록 편지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죽은 자에게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들을 고백한 글들입니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해본 것, 어머니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셨던 동치미 국물 한 그릇 못해드린 것, 아버지께 카네이션 한 송이 달아주지 못한 것. 우리네 삶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소소한 것을 가장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행복은 돈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침묵으로 말하지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며 살라고.
질문의 책
파블로 네루다 저, 정현종 역, 문학동네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입니다. 스물네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소제목 없이 전부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는 시집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재미있는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는 시집입니다. 좋은 질문만으로도 시가 되고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시애틀 추장 저, 류시화 편, 더숲
류시화 시인이 수집하고 우리말로 옮긴 인디언 연설문집입니다. 총과 병균과 사상을 앞세우고 쳐들어온 백인들에게 터전을 빼앗기고 물러가면서 남긴 연설들을 모은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시적인 연설은 오만한 백인 문명의 허구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과 정신세계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41편의 명연설과 해설, 희귀한 어록, 뛰어난 사진들과 독특한 인디언 달력까지 담고 있어 인디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디언들의 북소리처럼 울림이 큰 책입니다.
[시리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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