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에세이] 사는 날까지, 죽는 날까지

2024.08.05 조회수 681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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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호 스미스학부대학 연구원 / 철학자]

중학교 때 다녔던 서예 학원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혼자 썼던 적이 있다. 시가 마음에 들어 방에 걸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이가 지긋하신 원장님이 보더니 ‘죽는 날까지’를 ‘사는 날까지’로 바꾸어서 적어 보라고 권하셨다(시의 도입부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다). 어차피 같은 의미면 사는 쪽으로 사고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언어는 수와 달리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의미라도 다른 느낌을 전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인데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가수 김범수의 대표곡인 ‘보고 싶다’를 들어 보면 “죽을 만큼 보고 싶다”라고 한 후 “죽을 만큼 잊고 싶다”로 마무리한다. 누군가를 보기 바라는 것과 잊기 바라는 건 다른 말이지만 마지막 가사는 같은 의미를 좀 더 절실하게 전하고 있다. 이별의 순간 김소월 님이 노래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니 우리는 뭔가 강조할 때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생각보다 자주 구사하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등장인물의 죽음이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스토리 어딘가에 자주 활용되는 기법이기도 하다. 죽음은 끝이라는 극단적인 느낌과 함께 경험하지 못한 생경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 낯설다. 우리 모두는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철학의 역사에서 이 낯선 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었다. 고대의 에피쿠로스는 “살아 있을 때는 아직 죽지 않았고 죽으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건 죽어 가는 과정까지지 죽음은 아니니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미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좀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죽으면 영혼에서 감정을 느끼는 부분은 없어지지만 이성적인 부분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이후 근대 철학을 열었다고 하는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을 완전히 분리하면서 우리의 본질은 영혼일 뿐 몸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칸트는 우리가 살아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애써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완전한 선에 도달하려면 죽어서도 영혼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19세기 쇼펜하우어는 이런 전통을 거부했다. 이를테면 생각은 뇌에서 하는데 뇌가 죽은 다음에 무엇으로 사유를 할 수 있냐는 설명이었다.

▲ 사진=envato elements

동아시아에서는 이 테마에 대해서 민간과 지식인 사이에 꽤 큰 괴리가 있었다. 조상이 돌아간 다음 귀신이 되어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혹시 그분들의 원한이 있다면 풀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기(氣)가 바로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여하튼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영혼 불멸과 같은 사상은 발붙이지 못했다.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말한 공자 이래로 유학자들은 사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귀신을 부르는 무당을 멀리한 것도, 불교의 윤회설을 싫어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은 중국 북송 시대의 횡거 장재가 적은 “살아서는 하늘이 내린 일에 충실하다가 죽어서는 편안히 쉬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와 같은 문구를 책상에 붙여 놓곤 했다.

그럼 살아 있는 동안 하늘이 부여한 일에 충실한 자세는 무엇일까?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굵직한 질문이기도 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육십 대의 조르바가 아흔이 넘은 노인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나온다.

노인은 나무를 심고 있었다. 조르바가 물었다.

“할아버지, 그 연세에도 아몬드나무를 심으세요?

”노인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

그러자 조르바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세요?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

삶을 대하는 조르바와 노인의 태도 중 누구의 것이 옳을까? 사실 두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이가 아흔이든 예순이든 더 어리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혹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 아몬드나무를 심는 것이 사는 날까지 혹은 죽는 날까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월간 <가정과 건강>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