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에세이] 비건은 아닙니다만

2024.09.19 조회수 1,044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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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호 스미스학부대학 연구원 / 철학자]

20년 전쯤 채식 동호회에 가입해서 반년 정도 비건(계란,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채식인)으로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동호회 시솝(Sysop·운영자)은 지금 꽤 이름있는 채식 운동가로 활동 중인데 “우리의 음식 취향은 100% 습관에 의한 겁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우리가 만약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좋아할 리 없다는 말이다. 반년이 지나 참아왔던 고기를 구워 먹는데 입안이 즐겁다기보다 생경한 느낌이 들었을 때 이 견해가 약간의 진실은 담고 있다고 느꼈다.

채식을 하며 알게 된 어느 분에게 왜 비건이 되었냐고 묻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가 고플 때 굳이 닭 모가지를 비틀고 털을 뽑아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낸 후 기름에 튀겨 먹는 것보다 감자를 삶아 먹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더라도 닭보다는 감자를 먹는 선택이 여러모로 나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채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전공인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원 시절 서양철학, 그 가운데 윤리학을 전공하던 동료들 사이에서 피터 싱어(1946~)의 『동물해방』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에서 인권에 이어 동물권이 드디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시점이고 그 영향으로 채식주의자로 살겠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물론 고기를 끊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대부분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피터 싱어. 사진=피터 싱어 홈페이지 ⓒ알레타 밴더링

피터 싱어는 20세기는 물론 현대를 대표하는 공리주의자다. 공(功)은 전쟁에서 무슨 ‘공을 세웠다’고 할 때의 공이고, 리(利)는 이익을 의미하니까, 공리주의란 좋은 결과를 추구하는 사조를 말한다. 18세기 때 이 이론을 주창한 제러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행복은 모두가 바라는 상태이긴 하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고 측정도 쉽지 않아서 싱어는 행복보다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고통’에 주목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강아지만 먹지 않는다고 비윤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기획으로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분리되어 근육 없는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4개월간 움직일 수 없는 우리에 갇힌 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 이런 동물 해방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면 모두 싱어처럼 비건이 되어야 할까? 좋은 결정일 수도 있으나 다음 사례를 보고 좀 더 생각해 보자.

사람 살기도 바쁘고 힘든 세상에서 동물까지 신경 쓰는 비건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모 패스트푸드사의 감자튀김 사건이 있다. 이 회사는 감자를 식물성 기름으로 튀긴다고 광고해 왔고 채식인들 중에는 이 회사의 감튀와 콜라만 먹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럽의 채식인들 사이에 이곳 감자튀김의 맛이 너무 고소해서 이상하다는 의견이 조금씩 올라왔고 결국 이들은 이 기름이 식물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본사 앞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이 회사는 사실과 다른 광고를 한 것에 대해서 공식 사과했다(이후 지금까지 동물성 기름을 쓰고 있고 비건인들은 발길을 끊었다.)

▲ 사진=envato elements

내가 사적으로 경험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 채식인과 만날 일이 있어서 단골 파스타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집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고 우려를 표했지만 비건식으로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후 요리를 하는 사장님에게 토마토파스타를 100% 채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그런데 그녀는 식사 중에 맛이 조금 이상하다며 포크를 놓더니 혹시 고기 재료가 들어간 게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주방에 가서 물어보니 뭐가 문제인지 고심하던 사장님이 눈이 커지더니 말했다. “면을 육수에 삶았어요!” 그녀는 식사를 중단하고 음료만 다시 주문했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집에서 은둔하지 않는 한 고기를 먹지 않는 식생활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쉽지 않고, 특히 우유와 계란까지 끊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보통의 빵에는 우유나 버터가 들어가고, 보통의 김밥에는 햄이나 어묵이 들어가고, 보통의 탕이나 찌개에는 멸치나 고기로 우린 육수가 들어가니 말이다. 서툰 요리에 맛없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며 숨어서 밥을 먹다가 결국 지구와 동물을 살리겠다는 거창한 꿈은 그치게 된다.

6개월간 비건으로 살다가 그친 나는 어떤 식생활을 추구하고 있을까? 단식하던 사람이 더 무섭게 먹어 치우게 되는 현상처럼 고기를 더 밝히는 생활로 돌아갔을까? 그렇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피터 싱어의 주장에 꽤 공감하고 고기 위주가 아닌 채식 위주의 식생활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야채 없이 밥과 고기만 제공되는 식사보다는 차라리 비건식을 더 선호하며 친구들과 고깃집에 가서 쌈에 밥과 고기 한 점 넣어 먹는 불리한 태도로도 계산할 때 N분의 일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정도는 된다.

나는 채식이 좋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록 비건은 아닙니다만.

월간 <가정과 건강>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