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에세이] 마음속에 빛나는 별

2024.05.08 조회수 977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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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호 스미스학부대학 연구원 / 철학자]

몇 년 전 경상북도 안동의 한 도서관에서 특강을 할 일이 있었는데 가는 김에 가족여행까지 계획했다. 그중 하루는 도산서원에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농암종택이라는 고택에서 보냈다. ‘어부가’로 유명한 조선 전기 문인 농암 이현보의 집인데 멋들어진 강과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기품 있는 한옥과 정자가 어우러져 있어 언제 한번 묵어 봤으면 했던 곳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세상의 불빛도 꺼졌고 주변에 아무런 인공의 흔적도 없는 2월의 밤이었다. 시골의 하늘을 보고 싶어서 가족이 잠자리에 든 후 밤 11시쯤 홀로 밖에 나왔는데 바로 눈이 번쩍 뜨였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관측소에 온 것처럼 수많은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어서 용감하게 가족들을 깨웠다. 아직 날은 추웠지만 아이도 아내도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속 보다 보니 점차 빛나는 별들 사이의 흐릿한 별들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깜박이지 않고 뜬 상태로 유지하니 그 빛들도 선명하게 다가와서 그렇게 하늘 전체가 별로 뒤덮였다.

그때 윤동주 님의 시가 떠올랐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을 세던 시인이 마지막으로 두 번 부른 존재는 어머니였다.

이어서 옛날 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이 생각났다. 프로방스의 한 목동이 짝사랑하던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는 산에서 길을 잃고 목동과 밤을 지새우게 된다. 목동은 불을 지피고 앉아 그녀와 밤하늘을 보며 여러 별들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다 문득 어깨 위에 무언가 가볍게 닿는 것을 느낀다. 목동은 하늘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별이 길을 잃고 자신의 어깨에 잠시 내려와 잠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별에는 사랑, 아름다움, 순수함, 그리움, 설레임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혹시 딱딱한 철학의 역사에서도 별을 이야기한 이가 있을까? 근대 철학과 윤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칸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내 마음속에는 찬란한 도덕률

▲ 사진=envato elements

아마도 칸트는 자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철학을 구상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정말 우리의 내면에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얼마나 낭만적인가! 문제는 칸트가 말한 마음속의 보석이 도덕 법칙 즉 ‘의무’라는 점이다. 의무는 자유에 비해 부담스럽고 우리를 구속하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이런 의무가 어떻게 찬란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칸트는 이런 의무에서 ‘자유’를 발견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여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겨울에 따뜻한 카페라떼를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런데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어서 자유롭다면 그 자유는 정글의 사자나 호랑이가 먼저 누렸을 것이다. 칸트가 말한 진정한 자유란 각자가 고심 끝에 받아들인 자발적인 의무를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변함없이 따를 때 증명된다. 다음의 사례가 혹시 이해에 도움을 줄지 모르겠다.

에마누엘 레비나스(1906~1995)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러시아의 변방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철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에서 활동하였고 가족들은 고국에서 나치의 대학살 때 희생되었다. 이렇게 네 개의 문화를 거치며 누구보다 타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가족의 비극을 겪은 그가 ‘타자’에 대한 ‘환대’로 대표되는 사랑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철학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의무가 있었다.

평생 레비나스를 연구하던 일본의 어느 저명 한 학자(우치다 다쓰루)가 그를 만나겠다고 작심하고 편지를 쓴 후 파리를 방문했다. 집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으로 “올라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계단을 올라가자 문 앞에서 양 손을 벌리고 자신을 환대해 주는 레비나스를 만날 수 있었다. 감격에 겨운 학자는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헤어질 때 직접 가지고 간 스승의 책을 꺼내서 사인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유대인 철학자는 펜을 들고 사인을 하려다 멈추더니 너무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거절했다고 한다. “오늘이 예배일이군요.”

사인을 하려던 철학자의 손을 멈추게 했던 원칙은 그를 구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하고 있을까? 그 원칙을 별처럼 빛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 행위는 자유로움을 증명하고 있을 것이다.

날이 맑으면 밤에 잠시 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각자 간직하고 있는 원칙 몇 가지를 떠올려 보자. 그리고 의무와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글을 마무리하면서 방의 커튼을 걷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낀 탓도 있겠지만 저기 달만 홀로 있을 뿐 하나의 별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서울은 적어도 마음속의 도덕률을 확인하기에 좋은 곳은 아닌 듯하다.

월간 <가정과 건강>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