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시론]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

2023.05.16 조회수 1,992 커뮤니케이션팀

[김은배 신학과 교수 / 대학교회 담임목사]

지난 2월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그 강진의 여파는 언제 아물지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모든 잔해들을 걷어내고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하고 지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번 강진은 21세기 들어 일어난 자연재해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최악의 지진이었다. 이런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곤 하지만, 크고 작은 재난들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계속적인 전쟁 상태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이로 인한 국제 정세는 불안하고 우리나라의 형편 역시 경제는 고물가와 경기침체의 국면에서 그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안정은 요원하고, 남북관계는 불투명하고, 개인의 가계는 불안하기만 하다. 모든 삶의 기초가 속절없이 흔들리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강진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 펜데믹 같은 사태는 언제고 우리 앞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계속해서 마주할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이보다 더한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을 구약 성경의 예언자 이사야의 놀라운 선언을 통하여 예측할 수 있다.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사 24:18-20)는 예언자가 전하는 놀라운 선언이 마치 철퇴를 내리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에는 이러한 말을 들을 때 깊은 감명도 이해도 없이 그저 먼 옛날의 이야기로 흘려듣고 말았지만, 이제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가고 오늘 이 말씀은 이미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었고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예언자가 눈앞에 보는 듯이 그려놓은 대지의 기초가 흔들린다는 이 사실을 이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머지않아서 온 인류가 싫증이 날 만큼 경험하게 될 일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에도 어두운 시간, 위기의 시간, 고난의 시간이 찾아온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가 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기반이 취약하다’, ‘종말이 있다’라는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우리의 종교적 기반이며 신앙의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이유를 자신의 인생에 이런 위기가 없도록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의 이유는 오히려 이런 위기를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대지의 기초를 마련하시던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 대지의 모든 기초가 흔들린다는 사실과 이 세계의 붕괴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지와 인간, 금수와 초목은 피할 수 없는 종국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할 수 없는 불안이 이미 우리 속에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속적으로는 인간의 과학이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번영신학이다.

산을 흔들고 바다를 녹이는 진동하는 대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과학적 발견과 업적을 통해서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이 세상에 대한 낙관적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 같은 거짓 예언들이 우리들 주변에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혼동하고 이 땅이 흔들리며 대지의 기초가 떨리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오늘날 세상의 과학은, 세상의 철학은, 번영신학은 평화를 노래하며 이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진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기초이며, 토대라는 사실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종교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교회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신앙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교회에서 전해주는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그저 콧방귀 한번 뀌고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삶의 기초가 진동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냉소적일 수가 없다.

짧지 않은 목회 생활을 통해서 냉소적인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해도 우습게 생각하며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냉소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무너져 내릴 때,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영력한 당황과 절망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내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 삶의 모든 기초가 허물어지기 시작할 때, 냉소주의도 그것과 함께 붕괴되는 것이다.

종말의 순간에 어디 죽음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냉소적일 수가 있는가? 생존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건강을 잃었을 때, 거기 어디 냉소주의가 차지할 자리가 있는가?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했던 좋은 직장을 잃어버렸을 때, 거기 어디 냉소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재산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릴 때, 거기 어디 냉소주의가 존재할 수가 있는가? 가정이 깨어지고 사회가 혼란해 지고 국가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 어디 거기에 냉소주의가 자리할 데가 있는가?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너무나도 어이없이 흔들리며 붕괴되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 이런 순간에 인간에게는 단 두 개의 선택의 길이 남는다. 하나는 절망이다.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 때, 그 속에서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파괴의 확실성을 경험하며 두려워 떨며 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선택의 길은 신앙이다. 그 참담한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뛰어넘는 우리의 생존의 기반이 믿었던 재산이나 재물이나 사회적인 지휘나 명예나 가정이나 건강이나 인간관계가 아니라, 나를 생존케 하는 나를 존재케 하는 내 삶의 터전이 하나님 되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선택의 분기점에 서있는 사람들로서 도처에서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며 살고 있다. 바로 이 선택의 분기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 신앙을 다른 말로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 시대의 종교적인 의의이다. 우리는 이 파멸의 영역에서 피안의 구원의 영역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삶의 터전과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두려워하기 보다는 영원한 반석과 구원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월간 <시조>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