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시론] 다시, 은혜의 가치를 생각한다

2024.02.14 조회수 872 커뮤니케이션팀

[봉원영 신학과 교수]

개인 중심(me-centered) 사회

분명히 오늘날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더 우선하는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최근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성은 타인(他人)의 필요를 대체할 정도로 높아졌다. 사람은 서로가 주고받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발전시키게 되는데 요즘은 단지 두 사람의 만남 속에서도 각자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도 하고 궁금한 내용은 타인 혹은 상대에게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현격히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 자체를 줄어들게 하고 서로 간의 소통의 부재를 낳게 되어 공감 능력이나 인지 능력과 같은 사회적 능력을 저하시킨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이야깃거리를 찾아 대화한다는 것 자체를 감정을 소모하는 것으로 여겨서 피곤해하는 ‘나홀로족’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혼자 뭔가를 먹는 혼밥을 오히려 즐기는데 그러한 주된 이유는 자신의 식사와 관련된 취향, 상황 등을 타인에게 맞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중시하는 경향은 타인과의 관계를 확장하려는 욕구를 떨어뜨리게 하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만간 1억 개의 센서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광대역 폭을 지닌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본격적인 제4차 산업 혁명의 시대가 이르면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인간과 거의 유사한 인공지능을 가진 감성 인식 로봇의 등장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소통과 감정 통제의 노력 없이도 사람은 로봇과의 관계 형성과 소통을 더욱 편안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그 관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우리네 인간(人間)적 삶의 의미가 점점 더 사라져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은혜의 가치

2019년 여름, 미국에서 일 년 동안 연구년을 보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연구년을 보내게 될 학교가 마침 딸아이가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한동안 공부할 곳이기도 해서 차라리 집을 구입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함께 머물 곳은 정말로 작고 조용한 시골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집을 구입하는 데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직접 방문하여 둘러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부득이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집을 구입하는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사 2주 전 마지막 잔금을 치르는 날에야 그 집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2주 후에 들어간 집에는 집 앞뒤로 잔디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잔금을 치른 뒤로 2주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으니 잡초가 수북이 올라와 있었고 민들레가 노랗게 밭을 이루고 있었다. 어차피 잔디 공간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하자마자 탑승식 제초기를 구입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이란 곳이 물건을 주문한 후에 바로 그다음 날 배달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앞으로 며칠 동안 그 상황을 그대로 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길 건너편에 사는 한 가족이 새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을 환영하기 위해 방문했다. 서로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간단히 서로의 관심사들을 나누었다. 종파는 달랐지만 그들도 그리스도인 가정이었다. 한창 얘기가 진행되던 중에 그쪽에서 환영의 의미로 자기의 장비로 우리 집 잔디를 깎아 주어도 되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사실은 누군가가 이사 들어오기 전에 이 집의 잔디를 깨끗하게 깎아 놓고 싶었는데 주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허락한다면 자신이 잔디를 깎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 주도록 요청했고 마침 우리 가족은 예정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 바로 집을 나서야 했다. 두어 시간 후에 돌아와 보니 집 안의 잔디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감사했다. 온 가족이 일부러 방문해서 환영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인데 실제로 자기 집 잔디보다도 더 신경 써서 깎아 놓았으니 어떻게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장비를 사서 직접 깎아 보니 그 일은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다.

얼른 마트에 가서 가장 좋은 과일 한 박스를 샀다. 그리고 봉투에 돈도 좀 넣었다. 미국엔 공짜가 없으니. 그리고 그 집을 방문하여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하면서 과일과 돈봉투를 건네려는데 그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도 그리스도인이라 하셨지요? 더군다나 목회자라 하셨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은혜의 가치(the value of grace)를 모르시나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실천하면서 그 가치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고 저는 단지 그것을 실천했을 뿐인데요.”

은혜의 가치! 그랬다. 진정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나누어야 할 그 은혜의 가치를 잊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의 수고와 봉사를 단순히 돈 몇 푼 정도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 막 이웃이 된 사람이 나에게 베푼 호의에 대한 마음의 고마움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그러한 나의 행동에 불쾌한 지적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커뮤니티(community)’는 ‘서로’와 ‘함께’를 의미하는 ‘com’과 ‘선물’을 의미하는 ‘munus’가 결합되어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선물로 주어지는 집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사회는 분명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는 그것이 속한 더 큰 공동체를 향해서도 분명 귀한 선물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남이 가진 연약함을 업신여기고 무시할 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연약함을 가려 주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소망해 주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삶이 적어도 미래의 우리 세상을 염려하는 오늘을 위한 해답이 되지 않을까?

다시, 은혜의 가치를

2021년 여름, 그 가족을 다시 만났다. 우린 다시 그 ‘은혜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남은 인생에서 그것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겠는지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꼭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고 함께 약속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도 딸아이가 있는 그 집에 가면 다시 그 가족을 방문하려고 한다.

월간 <시조>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