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삶의 향기] 기억의 총합_하태임 교수

2016.01.12 조회수 3,831 홍보팀

마흔을 넘기고 인생의 2막을 두 아이의 엄마로 전력 질주하고 있다. 대학교수와 화가의 일을 해내야 하는 워킹맘의 상황에서 나의 기억력은 마치 배터리 12%의 저조함으로 아슬아슬하다. 방전된 나의 기억력은 늘 스스로를 비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로 존재한다. 특히 미술을 하는 나에게 치명적인 장애는 비주얼과 이름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는데 얼굴의 특징을 살펴보아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등줄기에 땀이 날 정도의 황망함을 수없이 겪으며 기억력 때문에 병원에라도 가볼까 하고 고민한 적도 있다.

 누구나 한두 가지의 건망증에 대해 토로한 경험이 있을 터다. 기억에 대해 논하자니, 예전에 화제가 됐던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메멘토>가 그것이다. 부인이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날의 충격으로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10분간 유지되는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로 줄거리가 구성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문신과 폴라로이드 사진, 그리고 자신의 글씨로 된 기록만을 믿으며 아내의 살해범을 찾으려 한다. 이 영화를 보며 ‘기억’이라는 것은 진실을 배반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나의 기억의 시작에 한 그림이 있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Le fifre>이 나의 현재 직업을 선택하게 된 동기의 맨 ‘처음 기억’의 무대를 장식한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서재엔 많은 책이 있었고 늘 그 책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던 것이 일상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시간, 아버지의 서재엔 오래된 종이의 싸한 냄새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마지막 황금색 빛줄기에 녹아 들고, 나는 서재 방바닥에 엎드려 명화집을 연다. 무채색 단색 배경에 소년만 덩그러니 화면에 서 있다. 소년은 명암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검은색 상의와 적색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서는 ‘콘트라포스트 자세’로 피리를 수평으로 들고 있다. 입 모양을 보아 가늘고 길게 소리를 뽑아내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마네를 모르면서 마네에 빠져들었다. 피리 부는 소년과의 깊은 눈맞춤으로 인하여, 그의 오묘한 입 모양과 발그레한 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그림의 영역에서 나의 ‘처음 기억’을 장악해 버렸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수많은 그림을 보았겠지만 모든 기억들은 걸러지고 마네의 그 소년이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이다. 그림 속 소년에 대한 기억은 그림에 대한 동경과 설렘을 일으키고, 다시 움직여 그 이후 내 생각과 그림에 투영되었다. 그 소년의 분위기에서 느꼈던 감성을 정물화와 초상화, 삼면화로 펼쳐내기도 하고 망망한 바다에 홀로 있는 외로운 섬으로 그려낸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 그리고 있는 추상의 색띠에 지금까지의 걸러진 여러 기억과 의미가 함축돼 표현되고 있다.

 기억이란 망각의 강에서 가라앉지 않고 살아남은 인상의 결정체다. 잊고 싶은 기억과 잊지 않고 부여잡은 기억 사이에 마음은 요동하지만 시간 앞에선 무력하다. 어느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서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시간 덕분에 퇴색되어짐을 알기에,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다시 살아갈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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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잊혀지기도 하고, 때로는 기억되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은 현재의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비록 또렷한 의식의 수준에서 기억되지 않더라도 매 순간을 치열하게 느끼고 생각하며 살다 보면 무의식으로 넘어간 나의 기억이 언젠가 창조적 힘으로 순간의 선택과 결정에 기여하리라 위로해 본다. 보잘것없는 기억력이지만 그렇다고 경험에 대한 감동과 인상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내 안에 남아 있어 현재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방전된 기억력에 대한 불안을 달래 본다. 현재의 다사다난한 일상들은 세월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총합으로 미래의 어떤 모습이 되어 나를 마주할까.

하태임 화가·삼육대 교수

◆약력 : 홍익대 미술대학원 박사/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 졸업/ 2015. 서울옥션 강남 개인전/ 2013. 가나컴템포러리 개인전/ 그 외 다수 개인전 및 그룹전 참여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19395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