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문학 속 가정 이야기] ‘티튜바’를 위한 애가(哀歌)

2023.03.24 조회수 2,639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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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의 메커니즘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저서 ‘폭력'(Violence)의 서두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로서, 폭력에 대한 성찰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리는 때로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좇다 보면, 보이지 않는 ‘거시적’인 것을 놓치기 마련이다. 마치 훔친 물건이 있는지 샅샅이 검사하느라, 손수레를 통째로 훔친 사실을 놓치고 마는 이 일화에서처럼 말이다. 이는 ‘폭력’이라는 주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유혈이 낭자하는 ‘가시적’인 폭력만을 주목할 때, 우리는 ‘거시적’인 구조적 폭력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지젝의 말마따나,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마녀사냥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마녀사냥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광기’라는 표현이 뒤따른다. 그러나 마녀사냥의 ‘광기’만을 주목할 때, 이 광기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너무나도 냉철하고 이성적인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을 간과하기 쉽다. 따라서 마녀사냥의 광기 이면의 사회질서에 내재한 구조적인 폭력을 주목해야만,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은 마녀사냥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크루서블’에 나타난 폭력은 어느 날 밤 세일럼의 한 숲 속에서 패리스 목사의 딸 베티를 비롯해, 아비게일, 티튜바 등의 마을 소녀들이 춤을 추면서 악령을 불러내는 모습이 패리스 목사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단이 된다. 베티와 당황한 아이들은 정신을 잃고 앓아눕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소녀들에게 마술 같은 사악한 기운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한다. 마을 사람들 중에 마녀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소녀들은 자신들이 금지된 놀이를 한 것에 대해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마을의 무고한 사람들, 평소에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 자신들과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마녀로 몰기 시작한다. 마녀재판이 열리자 고발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결국 스무 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녀사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광기’로 인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의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점은 그 동력이 광기가 아니라 이성에 있다는 것이다. ‘크루서블’의 세일럼 사회의 폭력은 놀라우리만치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된다. 마녀라고 고발을 당한 사람들은 증인의 증언에 따라 ‘적법’하게 소환되고, ‘적법’하게 재판을 받는다. 또한 ‘적법’하게 정해진 법에 따라 고백을 하면 석방이 되고, 고백을 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진다. 다시 말해, 지젝의 손수레의 일화를 적용해본다면 ‘크루서블’에서 재현되는 폭력은 다름 아닌 마녀사냥의 열기로 뜨거운 세일럼 사회 그 자체의 작동원리라 할 수 있다.

일례로, 유럽에서 마녀사냥의 불길이 가장 거세게 타오른 시기였던 1487년에 출간된 ‘마녀 잡는 망치'(Malleus Maleficarum)는 마녀사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이념뿐 아니라 마녀를 가려내는 법과 심문하는 방법, 사법적 절차까지 자세하게 담고 있다.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악명 높은 책이 광기가 아닌 이성으로 쓰였다는 점은 마녀사냥의 메커니즘이 무엇이었는지를 예증한다.

우리가 마녀사냥의 주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마녀사냥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크루서블’에서 목격했던 적법한 절차에 의해 행해지는 마녀사냥의 유산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작금의 시대에도 자신이 미워하는 ‘마녀’를 찍어내기 위해 ‘규정집’부터 들여다보며, 그 ‘마녀’가 규정을 위반한 것은 없는지 샅샅이 들여다보면서 감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적법한’ 절차에 의해 마녀를 제거하는 일은 직장을 비롯한 조직문화에서 비일비재하다. 슬픈 역사는 반복된다. 마녀사냥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마녀는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적으로 핍박을 받았던 존재들이었지만, 사실 종교적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마땅한, 가장 유약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크루서블’은 특히 젠더·인종·계급적 타자일 경우 집단적 폭력에 더 노출되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가장 먼저 고발되는 사람이 흑인 여자 노예 티튜바라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청교도들로 구성된 세일럼 사회에서 바베이도스 출신인 티튜바는 완전한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녀 사건에서 티튜바가 가장 먼저 고발당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흑인 여자 노예’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억압을 겪어온 티튜바는 세일럼에서 가장 먼저 조정되어야 하는 주변적 대상으로 호명되었던 것이다. 즉, 마녀는 티튜바처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외부인’이자 ‘주변인’이었는데, 이러한 존재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슬픈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티튜바와 같은 약자이자, 외부인이자, 주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마녀’라는 이름의 약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극단적인 모순적 행위를 반복해서 범할 수 있다.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망각한다면, 마녀사냥은 언제고 고개를 들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월간 가정과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