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문학 속 가정 이야기] 좋은 파수꾼이 된다는 것

2023.04.16 조회수 2,832 커뮤니케이션팀

《호밀밭의 파수꾼》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금서(禁書)’란 말 그대로 ‘금지된 책’을 뜻한다. 국어사전에서는 금서를 “출판이나 판매 또는 독서를 법적으로 금지한 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 문학사에서 금서의 목록을 살펴보면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있다. 지금은 ‘세계 명작’으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금서의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허클베리 핀의 모험》 《주홍 글자》 《베니스의 상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로,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문학 전집에 포함되어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책들을 “위대한 금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책들은 왜 한때 금서의 목록에 올랐을까? 이는 폴란드에서 《곰돌이 푸우》가 금서의 목록에 올랐던 연유를 살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 놀랍게도 《곰돌이 푸우》는 한때 금서였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캐릭터, 곰돌이 푸우가 말이다. 《곰돌이 푸우》가 폴란드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유는, 푸우가 하의(下衣)를 입고 있지 않아 외설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에서였다.

금서를 규정하는 기준은 주로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유해하다는 어른들의 판단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기준이 잘못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의를 입지 않은 푸우를 외설적이라고 비판하는 어른들의 기준이 문제적인 것이지, 하의를 입지 않은 푸우가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과연 푸우를 보면서 ‘하반신을 노출하고 있어 외설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곰돌이 푸우》를 금서로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어른들의 타락한 시선이다. 어른들은 《곰돌이 푸우》를 금서로 지정함으로써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 속담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다. “세상이 부도덕하다고 부르는 책들은 사실 세상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책들”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말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J. D. 샐린저(J. D. Salinger)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은 ‘위대한 금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금서 중 하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홀든은 ‘반항아’로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술과 담배를 하며, 가출까지 감행한다. 이러한 홀든의 모습이 청소년들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 때문에,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홀든은 문제아다. 하지만 홀든의 일탈 이면에는 어른 사회의 위선이 자리하고 있다. 샐린저는 사회에 만연한 위선에 대해 “세상은 인간인 척 하는 배우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느 아이들에 비해 조숙한 홀든은 어른 사회의 위선을 지켜보면서 실망한다. 아니, 절망한다. 홀든이 사회에 제대로 발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어른다운 어른의 부재, 신뢰하고 의지할만한, 존경할만한 어른의 부재 때문이다. ‘신뢰’, ‘의지’, ‘존경’ 등의 거창한 표현을 차치하더라도, 홀든은 그저 대화가 통하는 어른조차 찾기 힘들었다.

홀든은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면 호수에서 헤엄치던 오리들은 어디로 갈까 궁금해 한다. 홀든은 추운 겨울 호수가 얼어 갈 곳이 없어진 외로운 오리들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한낱 ‘오리 따위’의 행방과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드물 듯이, 몸과 마음 한곳 발붙일 데 없는 ‘문제아’ 홀든의 행방과 안위를 걱정하는 어른은 드물다. 일탈하는 책이 ‘금서’로 낙인찍히듯, 일탈하는 아이도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어른들의 눈에는 그 아이가 ‘왜’ 일탈을 선택했는지 보다, 그 아이가 일탈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어른다운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홀든은 급기야 자신이 스스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한다. 홀든은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뛰어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려고 하면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 파수꾼을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는 바로 홀든 자신이었다. ‘일탈’이라는 홀든의 선택은 역설적으로 ‘나를 붙잡아 달라’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일탈하는 아이를 붙잡아주는 것만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역할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홀든은 어느 날 거리에서 한 가족을 보게 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여섯 살 가량 되는 어린 아이였다. 그 어린 아이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인도와 차도를 경계 짓는” 곳을 걷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어린 아이가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걷는 동안 차들이 씽씽 소리를 내며 곁을 지나가지만, 부모가 어린 아이를 붙잡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저 어린 아이 곁에서 함께 걸을 뿐이다.

홀든이 인상 깊게 본 이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인도와 차도의 ‘경계’는 한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통과의례처럼 필연적으로 지나게 되는, ‘순수’와 ‘경험’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성장하여 언젠가 차들이 씽씽 달리는 것으로 형상화 된 험난한 현실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단순히 아이를 위험하지 않게 꽉 붙잡아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의 역할은 경계를 걷는 아이가 위험에 처할 때면 언제든 붙잡아줄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걸으며, 아이가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때 부모와 아이 사이에 형성된 신뢰감은 아이의 발걸음에 확신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것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걸음이 되도록 한다. 이는 아이가 첫 걸음마를 뗄 때 부모가 처음에는 아이를 꽉 붙잡아주지만, 종국에는 아이가 홀로 걸을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이는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탈 때 부모가 처음에는 꽉 붙잡아주지만, 종국에는 잡은 손을 슬며시 놓은 채 뒤에서 아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켜봐주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바로 이런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