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문학 속 가정 이야기] 멋쟁이 토마토는 왜 춤을 추는가?

2024.09.19 조회수 475 커뮤니케이션팀

[노동욱 창의융합자유전공학부 교수 /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울퉁불퉁 멋진 몸매에 빨간 옷을 입고 새콤달콤 향기풍기는 멋쟁이 토마토 토마토 / 나는야 주스 될 거야 (꿀꺽) 나는야 케첩 될 거야 (찍) 나는야 춤을 출거야 (헤이) 뽐내는 토마토 토마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국민 동요’로 자리 잡은 ‘멋쟁이 토마토’다. (▷영상보기)

이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야 춤을 출거야”라고 외치는 마지막 토마토가 유독 눈길을 끈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춤추는’ 토마토가 남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토의 인생(?)에서 ‘주스’가 되고, ‘케첩’이 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토마토 주스나 케첩이 되면, 대형마트에서 멋진 상표를 달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주스가 되면 고즈넉한 카페에서 예쁜 컵에 담겨 우아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케첩이 되면 식당에서 감자튀김과 함께 어울려 지내며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 토마토의 인생에서 주스나 케첩이 되는 것은 누구나가 꿈꾸는 소위 ‘메이저’한 삶의 선택지라 할 수 있다.

반면 ‘춤추는’ 토마토, 그것도 ‘울퉁불퉁한 몸매’를 스스로 멋지다고 착각하며 춤을 추는 토마토는 ‘마이너’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주스나 케첩처럼 ‘완제품’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책 없이 춤을 추겠다고 하니, 토마토의 부모가 들으면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하지만 역으로 춤추는 토마토가 눈길을 끄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춤추는 토마토의 진짜 매력은 남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

딴따라 정신의 재해석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오랜만에 열어 보았다. 당시 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이름과 사진 옆에 자신의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었다. 거기에는 자기 꿈인지 부모님의 꿈인지 알 수 없는 직업들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대부분 의사 아니면 판검사다.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춤추는’ 댄서가 꿈인 친구는 없고, 그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에 공부 안 하고 춤추러 다니는 친구가 있으면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커서 딴따라 될래?” 그렇게 비하되던 소위 ‘딴따라’는 최근 K-pop의 전 세계적 열풍과 함께 초대박 인기스타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대는 이렇게 ‘개벽’하고 있다.

내 생각에, 비하적인 ‘딴따라’라는 표현은 이제 21세기에 생존을 위한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딴따라 기질은 달리 말하면 무대 체질, 남들 앞에서도 긴장하거나 ‘쫄지’ 않는 자신감이나 배짱과 다르지 않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흥겨움을 줄 수 있는 능력,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나 리더십, 더 나아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확고히 걸어가는 소신이나 주관과 다르지 않다. 울퉁불퉁한 몸매를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며 춤을 추는 토마토 정신이 바로 딴따라 정신이다.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는 2022년에 Re-Framing ‘Growing Up’ For a New Age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제목은 “새로운 시대에 ‘성장’을 재구성하기”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번역 출간할 때 “세상에 없던 아이들이 온다”는 기가 막힌 제목을 달았다. 그렇다. 새로운 시대에 ‘세상에 없던 아이들’이 오고 있다. 아니, 이미 와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있던’ 방식, 아니 세상에는 오로지 이것만 있다고 착각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지 모른다. 프렌스키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아이들의 성장을 재구성하지 않은 채, 자신이 가진 낡고 오랜 기존의 틀에 아이들을 끼워 맞춰 구성하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 춤은 누가 춰?

그야말로 의대 광풍(狂風)의 시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잘 봐서 의대에 가겠단다. 수능시험은 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의사고시’로 불린 지 오래다. 사람을 살리는 가치 있는 직업인 의사가 되겠다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너도나도 의대에‘만’ 가겠다니 문제다. ‘나는 왜 의대에 가고 싶은가?’라는 근원적 성찰은 삭제된 채,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면 된단다. 일단 시험을 잘 봐서 의대에 간 뒤, 그때 성찰도 하고 소명도 찾고 적성은 끼워 맞추면 된단다. 아니, 그런 과정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돈만 잘 벌면 된단다.

대치동 학원가 ‘의대 준비반’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소수 정예 의대 반’이 성행하고 있다. 한 유투버가 ‘의대 반’ 초등학생들에게 “의사가 왜 되고 싶냐?”고 묻자 “몰라요.”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의대 광풍 시대의 어두운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메디컬 캠프’도 유행하고 있다. 나는 순진하게도 메디컬 캠프가 의료봉사대인 줄 알았는데, 의대 진학을 위한 학습 전략을 전수해 주는 사교육 시스템이라고 한다.

최근 의대 증원 소식에 의대 광풍은 더욱 휘몰아치고 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30대 대기업 과장도, 40대 공무원도, 50대 금융맨도 의대 입시에 뛰어들었고, 심지어 고2 아빠도 수험생인 아이와 함께 의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러자 한 칼럼니스트는 모두가 의대에 가면 “소는 누가 키워?”라고 반문했다. 모두들 케첩이나 주스만 되겠다면 춤은 누가 추는가?

영화 ‘조조 래빗Jojo Rabbit’에서 아이들은 히틀러라는 망령과 그 망령을 추종하는 망령들 틈에서 자신들은 망령이 되지 않기 위해 사투한다. 주인공인 ‘조조’라는 아이는 나치의 눈을 피해 다락방에 숨어 사는 유대인 소녀에게 묻는다. “나중에 다락방을 나가게 되면 뭘 하고 싶어?” 그 소녀는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결국 그 망령된 세상에서 끝내 살아남은 아이들이 둠칫둠칫 춤을 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아이들이 이 망령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둠칫둠칫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 춤추는 토마토처럼 말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