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시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24.04.09 조회수 972 커뮤니케이션팀

[최경천 신학과 교수 / 교목처장]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정의란 무엇인가?』(2014, 와이즈베리)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을 때 우리는 세계가 겪고 있는 불공평과 불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기를 기대했었다. 자본주의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부의 분배와 정의의 문제는 아무리 분석을 잘하고 원인 파악을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지난한 문제가 틀림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조금 더 구체화 시키면 힘과 권력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선과 더불어 온 국민의 관심은 누가 힘을 갖는 것이 내게 더 유리할 것인가를 주판알 튀기는 일에 가 있다. 샌델이 아무리 공공선과 사회적 가치를 설파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어도 인간은 쉽사리 권력욕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 이익이라는 권좌에 자신의 발목을 묶어 족쇄를 채운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거의 한계가 없는 권력 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인간의 권력 지향은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고자 타인을 살해하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더 많은 살해와 폭력은 성장, 힘, 권력, 불멸의 느낌과 함께 더 강한 권력을 향해 달려간다. 쉽게 말해 죽지 않으려고 타인을 죽어라 살해하는 것이다(한병철,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2024).

현재 우주 안에 하나의 점 같은 행성인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정복과 착취로 얼룩진 식민지 전쟁의 연장 이상이 아니다. 국가 대 국가, 기업 대 기업뿐만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기업이나 조직 내에서도 권력의 반지를 쟁취하기 위해 파벌을 짓고 연대하고 협상하고 사기를 친다.

선교인류학자들이 인도네시아령 이리안 자야(Irian Jaya)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문화를 파악하는 동안 그들의 의식 속에 형성된 영웅관이 기독교의 희생적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이야기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에게는 자신의 선생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훨씬 더 영웅적이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의 볼에 키스를 하고 완벽하게 속였기 때문이다. 부족들 간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을 영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는데 그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칼을 맞으며 했던 말과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

우정도 신념도 권력 앞에서 썩은 지푸라기처럼 힘을 쓰지 못한다. 한번은 석계역 앞에 있던 노숙자를 만나 그를 도우려 했던 적이 있다. 집에 데려다 씻기고 먹이고 병원을 데려가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가 결국은 다시 떠나 버려 나의 선행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지만 그가 덧없이 삶을 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의정부에서 친구와 사업을 하던 중 친구의 배신으로 부도를 맞고 맥이 풀려 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권력욕은 타인을 파괴함으로 얻을 수 있기에 세력화된 인간들은 전복에 전복을 거듭하며 피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묘사되었듯이 정의나 충성 같은 가치들은 대의명분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포장되면 순식간에 포악한 형태로 바뀌어 버린다. 실패하면 반란이고,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그 숭고한 종교라는 이름으로 처단한 순박한 이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졌다면 힘이 없어진 것이고, 죽었다면 권력이 없어 죽은 것이다. 무전무죄, 유전유죄라는 말이 특수한 말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라는 것을 투쟁해 본 사람들은 안다.

이렇게 권력에 대한 단편들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는 이 주제가 자신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 현장(그것이 사무직이든 노무직이든 상관없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한마디로 권력에 의한 착취의 현장이다. 심지어 종교 조직에서의 착취는 특정 종파나 교단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점조직 된 조직 내부의 힘겨루기에서 나타난다. 내가 아는 어떤 크리스천은 집안에 목사가 하나쯤은 있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자식을 신학교에 보냈다. 집안은 클수록 좋고, 인맥은 넓을수록 좋은 것이지만 힘과 권력이라는 역학이 움직이고 있는 한 순수는 없다. 영국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존 액턴(John Dalberg-Acton)이 언급했듯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가 1971년에 실시했던 감옥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18명의 대학생 참가자들에게 절반은 ‘간수’로, 절반은 ‘죄수’로 배정해서 건물 지하에 만들어진 모조 감옥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랬더니 간수 학생들은 곧 죄수 학생들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죄수들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역할을 준 것뿐인데 파괴적인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권력은 사람들을 나쁘게 만드는가? 어떻게 하면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가?

권력과 부패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영국의 브라이언 클라스(Brian Klaas)의 『권력의 심리학』(2022년, 웅진지식하우스)에서는 어떤 사람, 어떤 시스템이 더 쉽게 권력을 쥐고 부패하는지 파악했다. 권력이 부패하는 첫 번째 책임은 쉽게 부패할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부패한다. 권력이 가진 경향성을 인식하기만 해도 부패에 대응할 수 있다. 결국 부패하지 않을 유형의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는 권력을 갈망하지 않으며 권력의 자리를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일까? 석기 시대부터 전달된 집단적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집단의 생존을 위해 인간들은 독재를 용인한다. 기독교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2018, 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의 후반부에서 인간은 전쟁, 환경, 기후, 식량, 전염병 등의 위협이 높아지면 도덕적 타협을 통해 전체주의적 독재자를 용인할 준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을 파괴할 핵무기는 다른 곳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은 권력욕이 가진 부패성을 의식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인간은 자신이 살자고 타인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남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은 각자 믿고 있는 신념대로 선택할 것이다. 생존의 신념을 선택한다면 타인을 파괴할 것이고, 희생의 신념을 선택한다면 타인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의 대한민국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선택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월간 <시조>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