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칼럼

[문학 속 가정 이야기] 인류애와 가족애 사이에서

2024.04.09 조회수 961 커뮤니케이션팀

영화 《똑똑똑》

[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 문학사상 편집기획위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확행’은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한다. 그런데 혹시 ‘소확횡’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는 ‘소고기는 확실히 횡성한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횡성한우는 최고의 맛과 품질을 보증하는 소고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횡성한우를 즐겨 먹으면서도 정작 횡성한우가 어떤 소인지는 잘 모른다. 횡성에서 판매하는 소인지, 횡성에서 태어난 소인지, 횡성에서 자란 소인지, 횡성에서 자란 소라면 횡성에서 몇 년을 자라야 ‘횡성한우’라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지 말이다.

농수산물 원산지 표시법에 따르면, 소를 “1년 이상 횡성에서 키우면” ‘횡성한우’로 표시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키우던 소들을 횡성으로 데려와 도축만 하거나, 횡성에서 불과 몇 달만 키운 뒤 도축한 소들을 ‘횡성한우’로 둔갑시켜 비싼 가격에 판매한 업자가 적발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해프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횡성한우의 진짜/가짜 여부가 아니라, 횡성한우를 정의하는 규정 자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법에 따르면 소를 “1년 이상 횡성에서 키우면” ‘횡성한우’로 표시할 수 있는데, 이 법은 매우 미심쩍다. 예컨대, 정읍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10년 자란 소를 횡성으로 데려와 1년 키운 뒤 도축하면, 이 소는 정읍한우일까, 인천한우일까, 횡성한우일까? 어쨌든 법에 따르면 이 소는 ‘횡성한우’다.

뜬금없이 횡성한우 이야기를 꺼낸 것은, 횡성한우의 ‘정체성’ 문제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역주의, 지역갈등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거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도 이처럼 어려운데, 하물며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처럼 타인이 규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닐까? 예컨대, 강원도에서 태어나 10년을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서 10년을 산 사람은 ‘강원도 사람’인가, ‘서울 사람’인가? 경상도에서 태어나 20년을 살다가 전라도로 이사를 가서 30년을 산 사람은 ‘경상도 사람’인가, ‘전라도 사람’인가?

이처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어느 지역 사람’이라는 말은 ‘횡성한우’보다 더 미심쩍은 용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원도 사람’,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제주도 사람’, ‘충청도 사람’은 물론, ‘서울 사람/‘지방 사람’, ‘강남 사람’/‘강북 사람’ 등 끊임없이 사람을 분류하여 쉽게 규정 짓고 일반화 시킨다. 문제는 종종 이러한 ‘꼬리표’가 특정 지역 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편견, 혐오로까지 이어지는 ‘낙인’이 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지역주의, 지역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타인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히 하나의 그물망으로 떠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넓디넓은 세상에서 타인에게 너무나도 협소한 이름을 붙여 가며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의 협소한 마음이 만들어 낸 비극이 어찌 지역주의뿐이겠는가? 2022년에 발발하여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규탄하기 위해, 양국의 국적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부부가 세계를 순회하며 한 무대에 올라 평화를 기원하는 연주를 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우크라이나인 파벨 베르니코프(남편)와 러시아인 스베틀라나 마카로바(부인)의 아름다운 화음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벌이는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파괴적인지를 관객들에게 말해 준다.

‘소확세’(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

우리에게 ‘지역주의’, ‘민족주의’ 등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는 것이 바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누군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세계시민이오!” 그의 대답은 여전히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라는 이상적(理想的)인 단어에는 허상(虛像) 또한 존재한다. 지난해 개봉한 M. 나이트 샤말란(M. Night Shyamalan) 감독의 영화 《똑똑똑》(Knock at the Cabin, 2023)은 바로 세계시민주의의 이상과 허상을 지적한다.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어느 한적한 오두막을 방문한다. 그 오두막에서는 한 가족이 한가롭게 행복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낯선 사람들은 그 오두막을 무단 침입한 뒤 그 가족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제안을 한다. 지금 당장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가족 스스로 죽여야 하며, 그러면 다가오는 재난으로부터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영화 《똑똑똑》 스틸.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던 한 가족에게 낯선 이들이 찾아와 가족 중 한 명을 희생시켜야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황당무계해 보이는 제안은 사실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무거운 성찰을 담고 있다.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가족 1명의 생명을 내 놓을 수 있는가? 내 가족 1명의 목숨과,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가?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우리는 입버릇처럼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세계시민’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 영화에서처럼 전 세계 70억 명의 목숨을 구원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지도, 이를 위해 내 가족 중 한 명을 내가 스스로 죽여야 하는 혹독한 선택이 부여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기 위해 우리가 오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강남순은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에서, ‘코즈모폴리턴 정신’이란 곧 소외된 “주변인들을 향한 예수의 연민과 연대”의 시선을 배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구별 없이,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동일한 시민”(엡 2:19)으로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마치 내 가족처럼 귀히 여기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성찰해 보는 것, 그리고 매일 만나는 “지극히 작은 자”(마 25:40)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은 ‘소확세’(소소하지만 확실한 세계시민주의)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월간 <가정과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