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가정 이야기] 금쪽같은 내 새끼
《사일러스 마너》[노동욱 스미스학부대학 교수]“어린이는 쇠락해 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선물보다 더 많은 것, 즉 희망과 미래 지향적인 생각을 가져다준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소설 《사일러스 마너Silas Marner》는 이와 같은 제사(epigraph)로 시작된다. 이 제사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 〈마이클Michael〉에서 빌려온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구로 유명한 시인이다. 이처럼 엘리엇은 워즈워스의 시를 《사일러스 마너》의 제사로 인용함으로써, 어린이가 어른에게 얼마나 큰 선물과 같은 존재인지를 이야기한다.이 소설의 주인공 사일러스 마너는 절친한 친구 윌리엄에게 배신을 당한다. 윌리엄은 마너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운다.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은 억울한 누명을 쓴 마너의 말은 들으려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윌리엄의 편에 서서 마너를 정죄한다. 설상가상으로 마너의 약혼자 사라는 그를 떠나 윌리엄과 결혼한다. 이러한 일련의 충격적인 일들을 겪은 마너는 하루아침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마너는 쓸쓸히 마을을 떠난다. 우정, 사랑, 신앙, 그리고 삶의 터전까지 한꺼번에 송두리째 잃고 만 마너가 느낀 배신감과 절망감은 도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마너는 다른 마을로 이사하여 이웃들과 일체 교류를 하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마치 거미처럼” 아무 생각 없이 베틀 앞에 앉아서 그저 옷감을 짜는 일만 한다. 그가 베틀 앞에 앉아서 요즘 말로 ‘멍을 때리며’ 옷감을 짜는 것은 그러한 단순하고 기계적인 노동을 통해 과거에 겪은 충격적인 일들을 모두 잊고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였으리라.그러나 마너가 옷감을 짜는 행위는 이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마너는 옷감을 짜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얻게 된 금화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안식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끊임없이 일만 하며, 딱히 쓸 데도 없는 금화를 세어보며 흡족해한다. “신앙의 빛이 완전히 꺼지고 애정이 고갈되자 그는 온 힘을 다해 자기 일과 돈에 매달렸다.” 일의 대가로 받은 금화는 점점 쌓여갔지만, 그의 내면은 점점 고갈되어갔다.그렇게 살아간 지 15년 째 되던 어느 날, 마너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금화를 도둑맞은 그에게 금발 머리 아이가 찾아온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에피는 길거리에서 엄마가 동사하자 아장아장 걸어 인근에 있는 마너의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벽난로 앞 마룻바닥에서 금발 머리 에피를 발견한 마너는 그 아이를 금화로 착각한다. 도둑맞았던 금화가 제 발로 다시 찾아왔다고 착각한 것이다.“딱딱한” 금화 대신 찾아온 “부드럽고 따뜻한” 금발 머리 에피는 마너를 자기소외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의 일상이 이웃들의 삶과 얽히게 한다. 그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마너의 마음이 에피를 통해 ‘부드럽고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듯하다. 또한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전 재산이자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금화를 도둑맞은 사건. 에피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 사건. 마너의 인생에서 이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은 긴밀하게 교차하면서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이를 통해 마너는 어느 순간 금화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편협하고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에피로 인해 그는 마을 사람들과 소통 및 교류를 시작하게 되며, 잃어버렸던 신앙도 다시 찾게 된다. 마너는 “모든 순수한 평화와 기쁨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선(善)을 의식”하게 된다. 에피가 “다시 한 번 그와 온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계기가 된 셈이다.마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가 제게 온 뒤로 제가 이 아이를 제 몸처럼 사랑하게 된 이후로, 저는 온전한 신앙의 빛을 얻었어요.” 마너는 에피를 “제 몸처럼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 인간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느낀 뒤 신앙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금화’를 도둑맞은 뒤 찾아온 ‘금발 머리’ 아이 에피는 마너에게 요즘 말로 “금쪽같은 내 새끼”인 것이다.그런데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금쪽같은’ 아이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2021년 합계출산율은 0.8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는데, 합계출산율이 1명도 안 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구문제연구소는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 사회의 극도로 낮은 출생률은 우려스러움을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과연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부부들의 깊은 고심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최근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를 출산한 부모에게 ‘금화’를 쥐어주겠다는 정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출생률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아이를 출산했다고 해서 ‘금화’를 쥐어주기보다, 우리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해야 함을 보여준다.저출생을 우려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반(反)가족적, 반(反)인권적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이 버젓이 존재한다. 출산 및 육아 휴직은 여전히 눈치가 보여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남자의 육아 휴직은 굳건한 사회 통념이 가로막고 있어서, 육아의 부담은 고스란히 여자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은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곤두박질친다고 뉴스에서는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언젠가 ‘금쪽같은’ 아이들의 탄생과 성장이 진정으로 환영받는 푸르른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월간 <가정과 건강>
2024.02.02